“러브크래프트 서클”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군의 작가와 그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려는 시도입니다.
러브크래프트는 1935년 (동료 작가이자 자신의 사후 문학작품 처리를 일임한) R. H. 발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겁으로부터」는 내 작품으로 간주해도 무방해. 이 여성 작가가 제공한 것이라고는 고대 미라가 살아있는 뇌를 지니고 있다는 아이디어 하나뿐이니까.”라고 밝혔는데요. “이 여성 작가” 헤이즐 힐드는 러브크래프트의 공저자로 유명하지만 개인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러브크래프트가 생계의 수단으로 동료 작가들의 윤문과 대필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헤이즐 힐드와 인연이 닿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글에서는 “ 「영겁으로부터」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손을 댔다고 말해야겠다. 내가 그 놈의 작품을 썼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영겁으로부터」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초기 작품과 후기 크툴루 신화의 요소들이 결합된, (러브크래프트 작품 치고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가상의 금서 『검은 책』(일명 『이름 없는 제식』 또는 『비밀 의식』으로도 불리는 금서), 크툴루에 상응하는 “가타노토아”, 해저로 침몰한 전설의 고대 도시 “크나아”라는 가상공간. 언뜻 「크툴루의 부름」이 연상되고 실제로도 크툴루의 데자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단순비교를 떠나 작품간 특징과 차이는 분명합니다. 러브크래프트가 단편적으로만 언급하기 일쑤인 금서의 활용이 「영겁으로부터」에서는 효과적이고 구체적입니다. 가타노토아가 인간에게 가하는 위협감이 실제적이고 이에 맞서는 슈브-니구라스의 제사장 트요그를 대척점에 놓음으로써 크툴루 신화의 신적 존재들 간의 관계 설정을 더욱 모호하고 복잡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 골머리를 썩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집중할 것은 인간이 감히 쳐다 볼 수도 없는 무소불위의 악마신, 가타노토아와 이에 반기를 든 인간 트요크의 운명입니다. 러브크래프트가 우주 생태계의 최강자인 초고대 신에게 하찮은 인간이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거나 방기한 경우는 흔치 않거든요. 보스턴 소재 캐럿 박물관에 정체불명의 미라가 전시되면서 세간에 일대 반향을 일으킵니다. 이 미라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가타노토아가 등장합니다. 가타노토아를 본 인간은 석화 즉 돌과 가죽으로 변하고 두뇌만 살아서 영원히 죽지도 못합니다. 이 가공할만한 신의 비위를 맞추려면 인간은 당연히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무지막지한 가타노토아가 언제든 지상을 쑥대밭으로 유린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인간 세계를 짓누릅니다. 이 가타노토아에게 반기를 든 최초의 인간이 슈브-니구라스의 제사장인 트요그인데, 그가 바로 미라의 정체입니다. 트요그가 가타노토아 대항 부적을 품고 이 잠재적 공포를 없애기 위해 그 은거지로 찾아가지만 가타노토아를 모시는 사제들이 이미 간악한 속임수를 쓴 후입니다.
<책 속에서>
보스턴에 사는 사람들 누구나―혹은 다른 지역에 있더라도 예민한 독자들이라면 누구나―캐벗 박물관의 기이한 사건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신문 지상을 통해 알려진 그 끔찍한 미라 그리고 이것과 관련된 오래되고 무시무시한 소문들, 1932년에 행해진 컬트 의식과 병적인 관심들 나아가 그해 12월 1일, 박물관의 두 침입자가 맞은 섬뜩한 운명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대대손손 민담으로 전해져서 괴담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고전적인 미스터리 중 하나와 결부되어 있다.
이 절정의 공포를 설명하는 공식적인 분석들 저면에 뭔가 아주 치명적이고 극도로 섬뜩한 것이 은폐되어 있다는 점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채고 있는 것 같다. 두 구의 시체 중 하나의 상태를 두고 초기에 야기되었던, 불안한 단서들은 난데없이 초점에서 사라지고 무시되었다. 미라의 독특한 변화도 언론의 후속 보도로 이어져서 보통은 큰 주목을 끌었겠으나 이 또한 그렇지 않았다. 미라가 다시 관속에 복구되지 않았다는 것도 사람들에겐 이상한 낌새를 주었다. 요즘의 박제 전문가들이 볼 때, 미라의 손상이 너무 심해서 전시할 수 없다는 것은 서투른 변명에 불과하다.
이 박물관의 학예사로서 나는 은폐된 사실을 남김없이 밝혀야하는 입장이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럴 수 없을 터다. 이 세상과 우주에 관해서 대중이 모르는 편이 나은 일들이 있고, 그 공포의 시기 동안 박물관 직원과 의사, 기자, 경찰이 모두 비밀에 부치기로 한 약속을 어길 수도 없다. 반면에 과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아예 기록으로도 남기지 않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진지한 학자들에 보탬을 주고자 이 글을 준비해왔다. 내가 죽은 후에 이 글을 여러 신문사에 보내 조사를 촉구할 생각이나, 이 일의 성사여부는 유언집행인의 판단력에 달려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아시아인, 폴리네시아인 그리고 이질적인 신비주의 광신도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몇 가지 비밀 의식을 통해서 가해진 위협과 이상한 사건들로 인해 내 목숨뿐 아니라 박물관의 다른 직원들까지 목숨이 위태로워졌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유언집행자가 나서야할 때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유언집행자의 메모: 존슨 박사는 1933년 4월 22일 다소 의문스러운 심장발작으로 돌연사했다. 캐벗 박물관의 박제사, 웬트워스 무어는 이보다 앞선 3월 중순 경에 실종되었다. 같은 해 2월 18일, 이 사건과 관련된 해부 작업을 감독했던 윌리엄 미노트 박사는 등에 칼을 맞고 다음날 사망했다.]
공포의 본격적인 시작은 아마도 1879년, 내가 학예사 일을 하기 훨씬 이전으로 당시에 이 박물관은 오리엔트 해운으로부터 무시무시하고 불가사의한 문제의 미라를 입수했다. 미라의 발견 자체도 기괴하고 위협적이었다. 이것이 발견된 장소가 태평양 해저에서 갑자기 융기한 작은 땅과 함께 나타난, 기원을 알 수 없는 전설의 고대 토굴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