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학의 불후의 걸작 史記
『사기(史記)』 중국 한나라 때의 역사가인 사마천이 기전체(紀傳體)로 쓴 최초의 역사서이다. 표(表)·서(書)·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순서대로 하나의 위계적 동심원을 이룬다. 특히 『열전』에서 기전체(紀傳體)의 사서(史書)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가치 또한 매우 높다.
* 투철한 현장경험으로 기술된 歷史
사마천은 스무 살이 될 무렵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천하를 주유(周遊)했다.
사마천은 장안을 떠나 낙양(洛陽)으로 가서 회수(淮水)와 양자강(揚子江) 유역을 돌아 회계산(會稽山)에 올랐으며, 구의산(九疑山)을 둘러보고 원수(沅水)와 상수(湘水)를 건넜으며, 다시 북상해 민수(汶水)와 사수(泗水)를 지나 제(齊)나라와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의 수도 곡부(曲阜)를 거쳐 천하 명산 태산(泰山)에 오르고, 역산(繹山)에도 올랐으며, 파·설(薛)·팽성(彭城)을 들르고 양(梁)·초(楚)를 거쳐서 장안으로 돌아온 후 낭중(郎中) 벼슬에 오른다.
사마천의 투철한 현장경험(역사적 사건의 장소와 풍속을 접하게 된 여행길)은 후에, 중국 역사학의 최고, 불후의 걸작인 『사기』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모태가 된다.
* 궁형의 치욕 속에서도 굳은 사명감으로 기술된 歷史
『사기』 저술에 착수한 지 7년 후 어느날, 사마천에게는 뜻밖의 사건을 맞이한다.
대장군 이능(李陵)이 북방 원정길에 올라 흉노와 대적하여 5천의 정예병으로 1만의 적을 베고도 8만 대군에 포위당하여 항복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효무제(孝武帝)는 이능을 문책하고자 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그만 순수한 열정을 지닌 사마천이 단신으로 이능을 변호하고 나섰다.
“이능 장군만큼 충직하고 용감한 대장군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를 통틀어 어떠한 명장도 5천의 군사로 8만 대군을 무찌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창칼이 꺾이고 화살이 다하자 그는 맨주먹으로 적진에 뛰어들었다고 했습니다. 비록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지만 적에게 묶인 바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장군으로서 용맹함을 천하에 떨쳤습니다. 그가 이번에 죽지 못하고 적에게 항복한 것은 폐하를 욕되게 하려 한 짓이 아니라 후일 나라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함일 것입니다. 지난날의 혁혁한 대장군의 전공을 잊으시고 어찌 한 번 패한 일을 가지고 벌 주시려 하십니까? 차라리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은 총사령관 이광리(李廣利)를 벌하십시오!”
총사령관 이광리는 무제가 가장 아끼는 후궁의 오빠였다. 그렇기에 그것이 화근이었다.
사마천은 그 즉시로 투옥되었고 생식기를 거세(去勢)당하는 궁형(宮刑)에 처해졌다. 다행히 목숨은 부지 할수 있었지만 남성으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이며 악취나게 썩어 문들어지는 부형(腐刑)이었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 지금까지 저술한 중국의 통사(通史)를 마쳐야 한다!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시면서 권장하던 일이 아니던가.”
사마천은 생식기를 거세당한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서나마 살아 남기로 마음을 곧추세웠다. 그는 친구 임소경(任少卿)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최선의 죽음이란 조상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이고, 차선의 죽음이란 제 몸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로는 자신의 면목을 잃게 하지 않는 것이고, 넷째로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하오. 또한 그보다 못한 것으로는 신체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하오. 신체의 자유가 구속되어 부끄러움을 당하고, 붉은 수의(囚衣)를 입게 되어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갑이나 차꼬를 차고 볼기를 맞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모발을 잘리고 쇠사슬에 감겨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코나 귀를 잘리고, 입묵(入墨)을 당하고, 팔다리를 잘리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오. 그런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이란 것이 바로 궁형이 아니겠소. 부끄러움의 극치겠지요, 이런 형벌을 받는 죄수야말로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거요.
*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하늘의 도(天道)는 사사롭지 않고 늘 착한 이와 함께 한다고 하는데,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그들은 행실이 그토록 고결해도 굶어죽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진정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안연이라 했지만, 안연은 자주 궁핍하여 굶주리다가 끝내 요절했다. 극악무도한 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이를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 먹었으며 무리 수천 명을 모아 포악방자하게 천하를 횡행했지만 끝내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 이른바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天道是邪非邪)?”
오늘도 수양산에 올라
고사리를 캔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으로
바꾸고도
무왕(武王)은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과 순우의 호시절은
꿈인듯 홀연히 사라졌구나.
[채미지가 中에서]
“백이·숙제는 불의를 혐오했지만 사람을 미워하진 않았다. 그것은 주나라 무왕의 악(惡)을 비유했으면서도 스스로 남을 원망하지는 않았으며, 자신이 원망받지도 않았다. 이는 자신이 인덕(仁德)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군자(君子)란 세상을 마친 후에도 이름이 칭송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자이다. 백이·숙제도 이와 다름이 없다.”
한(漢)의 가자(賈子:賈誼)는, 탐욕한 사람은 재물에 목숨을 걸고, 의열(義烈)한 사람은 명예에 목숨을 걸며, 권세욕이 강한 사람은 그것에 끌려 죽고, 범용(凡庸)한 사람은 제 생명이나 탐하고 아낄 뿐이라고 했다. 같은 종류의 광명은 서로 비춰주며 같은 종류의 만물을 서로 구하고, 구름은 용을 따라 용솟음치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라 곧바로 일어난다. 이는 성인(聖人)이 나타나면 만인이 우러러보는 것처럼 백이·숙제가 현인이긴 하지만 비로소 공자의 칭송을 얻음으로써 그 이름이 드러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