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버리면 안 되는 것들 1
<우리나라 편 1> 쑥도 삼밭에서는 곧게 자란다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세계 제일의 빛나는 보물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 17만 2000여 일 동안의 일들을 날짜 순서대로 기술한, 단일왕조의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의 기록입니다.
특히 그것을 기록한 사관(史官)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해, 왕조차도 그 내용을 볼 수 없어서 진실과 신뢰가 완벽하게 보장되었습니다. 그리고 민간의 시시콜콜한 사건까지 기록해 세계의 어느 역사서와도 비교할 수 없이 풍부한 자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뛰어난 가치로 인해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우리나라의 중요 문화재이자 또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던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이런 내용까지 있습니다.
3대 왕 태종은 의식이 투철한 사관에게 자신을 따라다니며 시시콜콜 모든 것을 다 기록하게 했다.
한번은 태종이 걷다가 발을 헛디딘 일이 있었다. 태종이 그건 창피하니 제발 적지 말라고 했으나 사관은 끝까지 자신의 의무를 다해 이렇게 적어 놓았다.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을 하셨다. 헛발질 한 것을 적지 말라고 하시고, 적지 말라고 말하신 것 또한 적지 말라고 명하셨다.’
4대 왕 세종 때는 이런 기록도 있다.
‘훈민정음 반포를 축하하는 잔치에는 그것을 만든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왕의 수없이 많은 지시에 시달려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17대 왕 효종이 아버지인 선왕의 시호를 인조(仁祖)로 정하려고 하자 강직한 문신 유계(兪棨)가 소를 올렸다.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게 했는데 어찌 ‘어질다[仁인]’고 할 수 있으며, 오랑캐의 후예에게 무릎을 꿇었는데 어찌 ‘할아버지[祖조]’라 할 수 있습니까? 청하건대 고쳐 정하여 주소서.”
일개 신하가 돌아가신 선왕을 깎아내리는 것이 너무 분하고 원통해 효종은 그 자리에서 엉엉 통곡을 했다.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2000년이 넘는 우리 역사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1만 년 동안 잊지 못할 훌륭한 임금도 있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던 이름 없는 노비도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어떤 모양이든 우리가 버려서는 안 될 교훈을 남깁니다. 충성과 효도에서부터 청렴과 강직, 근면과 성실, 지혜와 의지, 의리와 신뢰, 용서와 반성, 겸손과 아량, 집념과 용기……. 참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한 수많은 덕성이 그 안에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어도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인간의 기본 덕목입니다. 이 책에는 우리 역사에 살아있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골라 뽑고, 그 인생의 가치를 알기 쉽게 정리해 실었습니다.
[책 속으로]
부모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아이들의 거울
고려 말의 충신 서견(徐甄)은 어질고 정직한 사람이었으나 고려가 망하고 벼슬을 버린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아무리 일을 해도 이웃에서 빌린 약간의 돈을 갚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에서 키우던 닭 몇 마리로 빚을 갚았다.
이튿날 부부가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집을 보게 하고 밭으로 나갔는데, 아침햇살이 퍼지자 어제 빚으로 갚은 닭들이 전에 살던 낡은 둥지로 돌아와 예닐곱 개의 알을 낳았다.
그것을 본 아들은 기뻐하며 둥지에서 달걀을 꺼내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차, 이 달걀을 낳은 닭들은 이제 우리 닭이 아니지. 그렇다면 이웃집 아저씨에게 돌려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아들은 서둘러 달걀을 이웃집에 갖다 주었다.
이웃집에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기특한 일이라고 크게 놀랐다.
“아버지가 시키시더냐? 어머니가 시키시더냐?”
“아니에요, 제 생각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셔서 안 계십니다. 그러나 돌아오시면 반드시 ‘어서 이 달걀을 돌려드리고 오너라’ 하고 말씀하실 게 틀림없습니다.”
이웃집 아저씨는 아이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해, 상으로 닭 두 마리를 주었다고 한다.
【부모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모두 아이들에게 거울이 된다고 합니다. ‘쑥도 삼밭에서는 붙들어주지 않아도 꼿꼿하게 자라며, 흰 모래도 진흙에 섞이면 함께 검어진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순자(荀子)의 가르침입니다. 더구나 달걀 몇 개를 받은 이웃집에서 상으로 닭 두 마리를 주었다니, 모름지기 오늘날 우리 이웃 관계에서도 배울 바가 많다 하겠습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돈이 아니라 눈물
가수 조용필(趙容弼)이 새로운 음반을 내놓고 한창 바쁠 때 한 요양병원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병원에 입원한 14세의 지체장애 소녀가 조용필의 새 음반에 수록된 노래 <비련>을 듣더니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입원 8년 만에 처음으로 감정을 보인 것이라고 했다.
병원 원장은 소녀의 보호자 측에서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조용필이 와서 소녀에게 직접 <비련>을 불러줄 수 없겠느냐고, 얼굴이라도 한번 보게 해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언론 인터뷰에서 이 말을 전한 매니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조용필 씨가 업소에서 노래 한 곡을 부르면 지금 돈으로 3000~4000만 원 정도를 받았는데, 조 씨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피우던 담배를 툭 끄고는 바로 병원으로 출발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날 행사가 4개였는데, 모두 취소하고 위약금 물어주고 바로 지방에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병원 사람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조용필이 병원에 도착해보니 소녀는 아무 표정 없이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런데 기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조용필이 소녀의 손을 잡고 <비련>을 부르자 소녀도, 그 부모도 펑펑 울었다. 조용필이 소녀를 안아준 후, 사인한 CD를 주고 차에 타는데 소녀의 어머니가 물었다.
“돈은 어디로 얼마를 보내면 되지요?”
그러자 조용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번 돈이나 앞으로 벌게 될 돈보다 훨씬 더 값지고 소중합니다.”
【‘자신을 존중하는 것과 같이 남을 존중하라. 남이 자기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그대로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 그 이상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최상의 비법이다.’ 중국의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입니다. 또한 동정 속에는 경멸이나 우월감이 들어 있기 쉽고, 자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가 그렇게 느끼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남을 이기려면 먼저 자기를 이겨라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난 안중근(安重根)은 헐벗고 굶주리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어지자, 항상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시던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어느 추운 겨울날 고향으로 향했다.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캄캄한 밤에 집에 도착한 안중근은 어머니가 거처하는 방 앞으로 갔다. 방에는 불이 켜져 있어서 그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 줄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 제가 왔어요.”
그런데 어머니의 반응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어머니는 방문도 열지 않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내 아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러 나가고 없다. 아직 큰일을 이룩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단 말이냐?”
안중근은 서글프고 기가 막혔으나 크게 깨달았다.
‘그렇다, 어머님 말씀대로 대장부가 뜻을 세웠으면 큰 공을 세울 때까지는 모든 것을 잊고 거기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남을 이기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기를 이겨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강인한 의지력을 키우는 데는 무엇보다도 부모의 정성어린 교육이 있어야 합니다.】
일상의 작은 일이 큰일을 이룬다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정홍순(鄭弘淳)은 호조판서에 올라, 조선 역사상 가장 긴 10년 동안이나 재직하고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평소에 검소와 절약을 앞세우며 매사에 치밀한 태도를 보였다.
정홍순에게 딸이 하나 있어 시집을 보내게 되었는데, 혼인날이 다가오도록 혼례 비용을 마련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부는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혼수품도 없이 시집을 갔다. 사위는 장인의 인색함에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 날 사위가 처가에 볼 일이 있어 갔는데, 저녁때가 되자 장인이 사위를 내쫓았다.
“저녁밥은 자네 집에 가서 먹게.”
사위에게 저녁 한 끼도 주지 않는 자린고비 장인에게 또 한 번 머리를 흔든 사위는 다시는 처가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처가와 연락을 끊고 산 지 3년이 지났는데, 장인에게서 할 말이 있으니 집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사위는 죽어도 가기 싫었으나 장인이자 한 나라 정승의 말이라 어쩌지 못하고 찾아가니 사위를 본 정홍순은 집문서와 땅문서를 내놓았다.
“내가 전에 혼례 비용을 알아보니 그 금액이 만만치 않더구나. 그 많은 돈을 헛되이 낭비할 수 없어서 그 돈을 늘려 집과 밭을 샀으니 이 문서를 받게. 이제 이 집과 밭은 자네 것일세.”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가 나라의 큰일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아, 항상 알뜰하게 살고 일상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허투루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일상의 작은 행동 하나가 큰일을 할 때도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큰일에서만 잘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일부터 신의를 지키고 올바르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욕심과 잡념보다 더 큰 도둑은 없다
조선 초의 문신 허조(許稠)는 이조판서를 세 번이나 지내면서 공정하게 인재를 등용하고, 효자와 충신의 자손들을 기용해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면서 황희(黃喜)와 함께 세종의 황금시대를 이끈 쌍두마차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런 허조의 집에 한밤중에 도둑이 들었다. 허조는 원래 밤늦게까지 책을 읽는 습관이 있어서 그 시간에도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도둑이 든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값이 나갈만한 물건을 다 챙겨 달아난 후에야 다른 가족들이 잠을 깨어 알게 되었다.
“대감께서 깨어 계셨는데 어찌하여 도둑이 든 것을 몰랐을까?”
가족들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으니 허조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더 큰 도적이 내 마음에 들어와 싸우는 중이었으니 어찌 바깥의 도둑을 신경 쓸 겨를이 있겠느냐?”
가족들이 대감의 말을 못 알아듣고 어리둥절해 있자 다시 말했다.
“재물 욕심과 잡념보다 더 큰 도적이 어디 있단 말이냐!”
【‘깨끗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야 옛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한 가지 선행을 보고 그것을 훔쳐 자기의 욕심을 채우게 되고, 한마디 좋은 말을 들으면 그것을 빌어 자기의 잘못을 덮는데 쓰게 된다.’ 《채근담》이 가르치는 배움에 대한 마음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