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마음으로 읽은 이문재의 삶과 세상
황금률을 잃은 모든 이를 위한 10년의 에세이
‘남들’과 함께 올라가야 하는 ‘삶의 산’들에 대한 이야기
세상을 흔들 수 없다면
세상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자가
세상을 흔들 것이다
1982년 동인지 『시운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해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한 시인 이문재의 산문집 『남들이 내려올 때 올라갔다』가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된다. 첫 산문집(『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호미, 초판 2006) 이후 20년 만에 펴내는 그의 두번째 산문집이다. “하염없이 지구를 걱정하는”(이영광 시인) 그의 이번 책은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신문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묶은 것으로, 그가 살아오며 새삼 절감한 93편의 순간들을 연도별로 나누어 실었다. “우리 삶이 갈수록 강퍅해지는 근본 이유는, 우리가 시의 마음, 즉 황금률을 잃어버렸기(또는 빼앗겼기) 때문이리라.”(「작가의 말」) 그에게 황금률이란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마음가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감이 요구되는 것을 일컫는다. 상대를 인간에 국한하지 않고 천지자연은 물론 기계와 도구까지도 아우르며, 그것의 처지에서 ‘나’를 바라보는 태도. 이것이 그가 여기는 황금률이자, 우리가 바라마지않는 ‘의식혁명’의 핵심이다. 그가 정의하는 ‘문학적 상상력’ 또한 결을 같이하는데, 공공성, 공적 가치와 무관한 문학은 그에게 진정한 문학일 수 없다. 그에게 문학적 상상력은 곧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이문재는 시인 루미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문밖까지 나가 웃으며 맞이하라”는 대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감정이입을 통해 나그네와 이방인을 맞아들이는 ‘환대의 문화’가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미래는 우리를 비켜 갈 것이라고 여긴다.(「군식구와 상상력」)
이번 책의 제목 『남들이 내려올 때 올라갔다』는 이원규 시인과의 만남에서 귀담아들은 말이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면 사진가들은 산에서 내려온다. 나는 그때 산으로 올라갔다.”(「남들이 내려올 때 올라갔다」) 20년 전 지리산에 깃든 시인, ‘땅’에 대한 애착이 도를 넘어선 시인. 독학으로 야생화 사진을 시작하더니 발상의 전환으로 어둠을 찍기 시작하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을 지닌 시인이다. ‘남들’로부터 한 걸음 비켜설 때,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할 때 보이는 ‘올라가야 할 산’. 그 산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 올라가야 할 산일 테다.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인류의 스승들을 떠올리며 두 손을 모으고 생각한다. “하늘을 자주 우러르게 하소서. 새로운 것을 알려 하기보다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알게 하소서. (……) 땅을, 그림자를 더 자주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지나간 미래가 또 지나가지 않도록 하소서……”(「작가의 말」)
이 배추는 누가 키웠을까,
이 고등어는 누가 잡았을까,
이 쇠고기는 어디서 왔을까
그의 93편의 산문 중 가장 먼저 소개되는 글은 우리가 매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그곳, 「식탁에 앉으면 세상이 보인다」이다. 식탁에 앉은 아이들은 저마다 젓가락 잡는 법도, 앉은 자세도 다 다르다.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곳,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이 가장 자주 앉는 자리가 식탁이다. “누구나 하루에 두세 번은 앉는 식탁. 하지만 식탁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식탁은 어디에 있는가. 식탁에 무엇이 오르고, 식탁에는 누가 앉는가. 시인이 어렸던 때 그에게 주방은 부엌이었으며 식탁은 밥상이었다. 때론 훈육 시간이 되기도 했지만, 밥상에 앉은 저마다가 주인공이 되어 하루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였다. 장소는 공간과 다르다. 인문지리학에 따르면, 공간을 인간화하고 사회화한 곳이 장소다. 그러니 그에게, 우리에게 식탁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야기가 전승되는 장소였던 셈이다. 장소는 인간과 사회, 인간과 지구의 관계가 형성되는 곳이다. 장소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곧 타자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능력이며, 장소가 없으면 감수성도 없을 것이라, 장소가 없으면 타자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러나 개수대가 싱크대로, 밥상이 식탁으로 바뀌는 한 세대 사이, 그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시인의 가족이 땀흘려 가꾼 식재료로 만들었기에 원산지를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을 과거와 달리, 요즘의 식탁 풍경은 사뭇 다르다. 식탁에 앉아 다양한 나라에서 출발했을 식재료들을 살펴보면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이 음식들이 에너지 고갈, 기후변화, 토양 및 해양 오염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유난히 입이 짧은 막내아들에게 사찰의 공양게송을 응용해 이 배추는 누가 키웠을까, 이 고등어는 누가 잡았을까, 이 쇠고기는 어디서 왔을까 하고 물으면 아이는 식탁에 지구 전체가 올라오고 있으며, 들과 산과 바다에서 시작해 우리 식탁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산업문명 시스템이 개입돼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기업형 화학농이나 과거의 산업문명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의도는 단순하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라는, 그리하여 우리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우리. 너무도 중요한 음식의 U턴 지점인 ‘식탁’에서 시인은 식탁이 더이상 일과 일 사이에 있는 경유지에 불과하지 않기를, 다시금 우리의 이야기가 빚어지는 삶의 자리가 되기를 바라본다. “우리가 밥 한술을 들면서 햇빛과 땅과 비와 바람과 바다를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가 필요하다
내 안에, 우리 사이에 시가 많아져야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보이되, 잘 보이지 않는 코를 자기 자신이라 여겼고 그렇게 우리의 ‘코’는 스스로 자自 자의 기원이 되었다.(「아주 낯선 낯익은 이야기」)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눈으로 코에 초점을 맞출 수 없듯 우리는 자신 안의 ‘수많은 나’를 장악하기 어렵다. 이야기가 빚어지는 ‘식탁’이 사라진 세대(「식탁에 앉으면 세상이 보인다」), ‘식량 문제’를 배제하는 사회(「식량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면하지 않는 현실(「가해자가 없는 사회」) 등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부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낼 기회를 잃고 있다.
시인은 민주주의를 바라보면서도 투표장에서만 실감 가능한 민주주의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가 바라는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일까.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 경기와 선거는 분명히 다름에도 어째서 정치가 어느새 스포츠화된 것인지 시인은 묻는다.(「‘붉은 악마’와 녹색 정치」) 그가 사는 아파트 동대표 후보 공약에는 사람이 없고 경제 논리만 존재했다. 시인이 후보라면 어떤 공약을 내세웠을까? “주말마다 벼룩시장을 열겠습니다, 텃밭을 만들겠습니다, 경로당에서 옛날 얘기 듣는 밤 행사를 갖겠습니다……”(「민주주의는 ‘마음’이다」) 그러다보면 서로 마음을 열고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가 단절되었던 ‘아파트’에서도 마을을 위한 창의적인 이야기가 샘솟을 것이라 시인은 믿는다. 티비 프로그램 속 할머니는 죽어가는 소에 대한 보상은 필요 없으니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심정’으로 도우라고 말한다. 시인은 할머니가 백석 못지않은 시인이라고 믿는다. 시는 감수성이고, 우리가 감수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이 무지막지한 돈의 논리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그래서 우리는 시가 필요하다. 내 안에, 우리 사이에 시가 많아져야 한다.”(「우리는 시가 더 필요하다」)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내 삶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이 같은 질문을 부여잡고 삶과 사회, 정치와 국가를 돌아본다. 문제는 이야기다. 이웃과 더불어 자기(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창의성이다. 이 같은 창의성이 공포와 분노, 무기력을 건강한 에너지로 승화시킨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기 정치, 즉 삶의 정치의 출발점이다. 도시 곳곳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자. 연극, 노래, 춤, 책읽기, 글쓰기, 걷기 등 어느 것이든 좋다.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은 이야기를 빚어내자. 좋은 이야기가 좋은 미래다.
_「좋은 이야기가 좋은 미래다」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