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문학상 수상 작가 이기리 신작 시집
“아주 포근한 적막만이 남을 것이다”
가장 선명한 빛으로 발하는 눈부신 여백의 자리
모두 흩어지고 사라진 빈자리을 응시하는 ‘단 하나의 눈빛’
문학동네시인선의 252번째 시집으로 이기리 시인의 『캔버스에 유채』를 펴낸다. 비등단 시인 최초로 김수영문학상(제39회)을 수상하며 우리 시단에 자신의 이름을 단숨에 강렬하게 각인시킨 이기리의 세번째 시집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이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나’ 사이의 행간을 벌려놓고, 여전히 ‘진행중인 진실’을 마주하겠다는 태도”(유계영 시인)로 써내려간 첫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민음사, 2020), 아물어가는 상처 위 눅눅하게 들러붙은 복잡다단한 감정의 딱지들을 벗겨내고 소중한 장면들만 선선한 바람결 속으로 내어 말리는 두번째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문학과지성사, 2022) 이후 사 년 만이다. 그간 시인은 “결코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을 시의 의지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음을”(김언 시인) 몸소 증명하듯, 과거로부터 현재로 연결되고 성장하며 확장하는 입체적인 시세계를 우리에게 선보여왔다. 시간을 한 계단 한 계단 되짚어올라가 말간 얼굴 깊숙이 깃든 슬픔을 끄집어내고, 두고두고 기억에 남기고 싶은 찰나들만 새로이 포착해 구김도 주름도 없이 세심하게 펴내는 특유의 손길. 그리고 어느 때보다 뜨거운 빛이 작열하는 이 여름, 시인은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긴 시간 간직하고 있던 그 모든 표정과 장면들을 마침내 빛 한가운데로 꺼내놓는다. ‘캔버스에 유채’, 빈 종이 위에 새하얀 빛을 남김없이 그러모아 자신만의 색채로 펼쳐 보이겠다는 듯이. 이제 그는 “태풍이 불어 집이 쓸려가고 나무가 부러져도/ 여전히 여름 한가운데에서 무지개를 찍을 사람”(「시절 전환」)이 되기로 한다.
흐린 날이 점점 개면서
아무도 타지 않은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치고
너는 그 건너편 거리에 서서
햇살 속 적막한 행간의 부드러운 꼬리를 쓰다듬는 장면
순식간에 도로 위를 달리던 자동차들 멈추고
정류장 옆에 서서 고개를 바짝 들고
두 팔 들어 사진을 찍는 한 사람과
바구니에서 쏟아진 표정들이 언덕을 구르는 장면
너는 뒤에 무슨 좋은 풍경이 있나 궁금해한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 풍경은 좋을 수 있을까
_「시절 전환」 부분
빛은 빈 공간에 깃드는 것. 시인의 눈-빛이 가닿는 곳도 비어 있음으로써 태어나는 부재의 자리다. 본래는 존재했던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 시인은 그 빈 공간을 응시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무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자국이 말끔히 지워질 때까지, 때로는 그 자리에서 없음이 솟아나는 순간까지 시인은 기다린다. 그런데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접합되어 있”(「물뭍에서」)어서일까. “거의 다 지울 수는 있”(「생몰년」)지만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지우고 닦아내도, 자꾸만 “무언가 물컹한 기운이 뒤꿈치에”(「보호막―풀베기」) 올라오는 기분. 밟고 지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리움은 곁이 마음대로 휘갈긴 필체”(「아순시온」)일 뿐이라고 거듭 되새겨도 작별 앞에 다글다글 들러붙는 “이 지긋지긋한 미련”(「보호막」)은 결코 떨쳐내지지 않는다.
한쪽 팔이 문틈에 끼어
혼자 대롱대롱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
팔이 뽑혔는데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무엇이 또 걸렸는지 모르겠는데
무엇이든 버려야만 할 텐데
_「보호막」 부분
한편 없어(져)서가 아니라 함께여서 생겨나는 부재의 자리도 눈에 들어온다. 이 틈은 ‘나’와 ‘당신’, 즉 우리 ‘사이’에 발생하는 기껍고도 안타까운 실존적 틈이다. 차라리 함께하기에 생겨나는 여백. 이곳에 자리한 것들은 화자에게 다양한 크기와 질감으로, 나아가 무한히 변화하는 투명한 감각들의 총체로 다가든다. 침묵과 적막, 울림, 여운…… 눈에 보이거나 소리로 들리지는 않지만 우리 몸속의 신경 다발처럼 무수한 결을 이루는 것들. 가장 안쪽에서부터 주변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다 마침내 존재 전체를 휘감아버리고 마는. 그러니 꼼짝없이 붙들릴 수밖에.
목소리가 들러붙은 곁은 물컹해서
포옹이 돌아서면
안을 가득 헤매던 호흡들이 터지면서
벽에서 눅진하게 흐르는구나
(……)
빈자리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끝내도 될까요
_「섭동」 부분
빈자리에 빛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바로 온기다. 시인의 눈빛이 가닿는 자리마다 “불을 눈앞에서 잠깐 붙였다가 꺼뜨리면서 남는 온기”(「신변 보호 요청」) 같은 잔열이 번진다. 헤어지는 이들, 상처받은 이들, 상실한 이들의 연약한 마음을 속속들이 덥히고 슬픔을 말리는 온기. 이는 “사라진 존재에게 또다른 삶의 리듬을 주는 것. 근사한 인사를 건네주는 것”(‘미니 인터뷰’에서)이나 다름없다. 『캔버스에 유채』는 여름 한복판, 가장 따사롭고 환한 빛을 발하며 우리 곁에 와 있다.
화창한 초여름 날씨에 나무는 빛 보관소입니다. 저마다 가지 끝에 틔운 초록 이파리에 밝음을 모아두었다가 오늘 가장 고개가 무거운 사람에게 몽땅 다 줍니다. 길을 걷던 사람이 문득 나무를 쳐다봅니다. (……) 나는 필사적으로 빛을 붙잡아두는 모임에게 인사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의 풍성한 공중을 봐. 언젠가 여백 따위는 잃어버려도 좋겠지?
_「칭찬 나무」 부분
여백, 침묵, 적막…… 이것들은 무(無)의 세계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다가 사라졌음을 뜻하는 흔적의 세계이다. (……) 언어가 아니라 침묵을 통한 소통, 의미가 아니라 억양을 통한 정념적 소통, 더하여 침묵의 억양을 향해 화자는 나아간다. (……) ‘부재’는 없음, 즉 무(無)가 아니라 어떤 존재의 사라짐으로 인해 발생한 존재론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시인은 그 부재의 자리를 반복적으로 응시함으로써 그것이 무(無)가 아님을 밝히고 나아가 부재에 일종의 ‘윤곽’을 제공하고자 한다. _고봉준,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