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장 잘 망설인 문장들이 여기 있다”
고집스럽게 사유하고, 섬세하게 직조하는 문학적 용기
인공지능 시대,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인간 본질에 관한 일곱 개의 질문
긴 여름 후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처럼, 가을을 예감하게 하는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올해도 새로운 이름들과 함께 독자를 마중한다. 올해 김승옥문학상은 2025년 7월부터 2026년 6월까지 주요 문예지와 웹진에서 발표된 총 141편의 단편소설을 심사 대상으로 삼았다. 철저한 블라인드 심사와 치열한 토론을 거친 끝에 송지현, 박서련, 서유미, 안보윤, 임현, 정용준, 정이현이 수상자 명단에 올랐으며 송지현이 영예의 대상을 받았다. 어느덧 등단 10년을 넘기며 올해 첫선을 보이는 송지현, 박서련, 임현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김승옥문학상에 불어온 새로운 바람을 목격하는 순간이다. 서유미, 안보윤, 정용준, 정이현은 지금껏 독자들이 보낸 애정과 믿음에 보답하듯 더욱 탄탄한 짜임새와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으로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AI가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우리 삶은 매일같이 더 간편해지고 한층 더 빨라졌다. 인생의 기로에서 마주한 선택을 위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식사 메뉴나 여행지 선정 같은 사소한 판단과 결정에서마저 이제 AI가 우리의 뇌를 대신한다. 사유를 외주화하고 머묾을 거부하는 시대, 문학은 외려 모두가 털어낸 곳으로 걸어가 고집스레 머물고 주위를 둘러본다. “한 자 한 자 문자를 세공하며 서사를 만드는 문학이 어느새 장인 정신까지”(심사 경위 및 심사평) 필요해진 사회에서, 인간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일곱 편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대상 수상작인 「누구보다 잘하는 일」은 ‘언니’와 ‘동생’ 자매, 두 사람의 어머니인 ‘옥씨’와 ‘조이 이모’, 이렇게 두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다. 푸념과 하소연을 숨쉬듯 털어놓으며 두 딸에게 서슴없이 돈을 빌리는 옥씨가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자매는 입원 기간 동안 옥씨를 번갈아 간병하는데, 퇴원이 가까워지자 옥씨는 당연하다는 듯 병원비까지 자매가 수납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이 조이 이모에게 빌려준 돈이 있으니 그것을 직접 받아 병원비를 해결하라면서. 자매는 그렇게 텅 빈 집에 홀로 사는 이모를 방문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자매 자신들뿐만 아니라 옥씨의 오래된 기억과 마주한다.
인물들은 특별히 슬퍼하거나 특별히 기뻐하지 않고, 다만 해야 하는 일을 차근히 해낸다. 지긋지긋하고 지독해도 여전히 가족이기에 관계는 간단하게 단절되지 않는다. 소설은 이들이 화해하거나 이별하거나 회복하거나 하는 특정한 방향을 선택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다만 자매와 옥씨가 함께 무언가를 하는 행위만을 묵묵히 보일 뿐이다. 가족은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짐”이 되기도 한다는 쓰라린 사실, 이미 뿔뿔이 해체되어 있지만 동시에 “기억의 공동체”(김화영 리뷰)로서 지속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가족을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리고 있느냐고.
“작품은 돌이킬 수 없이 붕괴한 가족주의와 이미 속부터 문드러진 가부장제의 안에서 각개전투로 생존을 도모했던 여성들을 비춘다. 미움을 제거하지 않고 사랑도 채색하지 않으며 여자들의 별별 못난 개성을 숭고한 모성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단연 고유한 가족 소설의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하는 이 작품에 전 세대 심사위원들의 고른 지지가 모였다.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손실을 확정 짓는 주식 용어 ‘손절’이 시대정신이 된 오늘날, ‘손절’과는 다른 대안적 관계를 상상하는 독자들과 함께 읽고 싶은 작품이다.” _심사 경위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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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이 맞닥뜨리는 욕망까지 인간의 다채로운 면면을 담아낸 이야기로 가득하다.
「변신 이야기」는 다른 동물로 변신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진 한 여성이 희귀 품종 번식에 가담하기 위해 뱀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다. 결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큰돈을 벌고자 암컷 뱀이 되어 번식 실험에 참가하지만, 실험실에서 만난 수컷 뱀에게 사랑을 느끼며 그와 뱃속의 자식들과 함께 뱀으로 살고자 한다. 소설은 인간의 욕망과 동물의 본능을 동시에 밀어붙이며 “소설의 육체”이자 “소설의 장면이 해낼 수 있는 일”(최은미 리뷰)이 무엇인지 강렬하게 선보인다.
「신년음악회」는 고요하되 묵직하고 고독하되 후회하지 않는, 인간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성실히 풀어내는 소설이다. 남편이 사망한 후 합창단에 들어가 신년음악회를 준비하는 ‘효진’은 합창단원들 사이에 서서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삶에 남은 균열과 허무를 곱씹는다. “삶의 작은 기미와 설렘, 지루하고 기분 나쁜 울렁임, 불안으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 등”(강영숙 리뷰) 서유미가 소설로 쌓아놓은 삶의 면면은 우리를 단원들 속에 놓기도 하고, 그 단원들 사이에서 쓸쓸히 노래하는 ‘효진’의 맞은편 관객석에 앉히기도 한다. 떠나간 것과 그후의 삶을 되짚는 서유미의 음악 같은 문장에 귀기울이지 않을 방도가 없다.
「커튼콜도 없이」는 서로 다른 조건과 상황에서 일하고 생계를 꾸리지만 빈곤에 허덕인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여성의 삶을 나란히 놓는다. 예술성과 자유에 삶을 맡긴 ‘향모 언니’를 바라보는 ‘연수’, 그의 삶은 언니와 정반대로 자본과 계산이라는 가장 세속적인 습속에 길들여져 있다. 인형극을 하는 향모와 누군가의 지인으로 연기하는 연수는 각각 “자신은 선한 인간이라는 믿음”으로, “사회 속에 생존하는 방식”(황종연 리뷰)으로 연극을 택한다. 소설은 “연극적인 것이 예술적인 것과 분리되고 실용적인 것과 결합한 끝에 보통 사람의 돈벌이 수단”(같은 글)이 되어버린 작금의 사태에 주목하며 현대사회에 내재된 소외와 비극, 그 모순을 심오하게 고발한다.
「너는 나의 이야기」는 노년 여성의 ‘자서전 쓰기’라는 독특한 제재로 진행된다. 장애가 있었던 자식 ‘고명근’을 잃고 지내는 생활을 천천히 관찰하고 묘사하며 시작되는 소설은 나아가 화자인 ‘장형자’ 자신의 삶 전체와 내면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임현은 이를 비극이 아닌 막막하지만 꿋꿋한 삶의 빛으로 천천히 풀어낸다. “작가가 자신의 렌즈를 최소화한 채 자기 외부의 고통을 투명하게 받아들여야 가능”(김금희 리뷰)하다는 설명은 이 소설과 임현의 시도가 삶의 난감함과 숭고함을 해치지 않고 포착해냈음을 보여준다.
「검침원」은 초보 가스 검침원인 ‘송수’와 경이로운 실적을 기록하는 베테랑 검침원 ‘순무’가 한 집의 검침을 함께하다 얽히는 이야기다. 타인의 마음과 상황 그리고 비밀을 들여다본다는 행위가 집집을 돌아다니는 검침의 외피를 쓸 때, 그렇게 송수씨와 순무씨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타인의 비밀을 마주하게 될 때, 소설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주는 다정한 구원으로 나아간다. 뿐만 아니라 정용준 특유의 리듬감과 유려한 문장은 그가 촘촘히 만들어낸 인물들을 거쳐가며 빛을 발한다.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없이 작중인물의 마음 알아주기에 온 힘을 다하는”(김경욱 리뷰) 정용준은 소설의 이야기를 풀어둠으로써 종국에는 우리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풀어놓게끔 한다.
「실패담 크루」는 기묘하고 독특하지만 오싹할 만큼 현실적이다. 방치 가정에서 나고 자라 악착같이 성공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화자는 수습 변호사로 일하던 로펌 대표의 전 애인 ‘성지연’에게 발탁돼 실패담을 나누는 모임에 초대받는다. 실패담을 발표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딘가 기묘하고 계급 격차를 느끼게 한다. “감정과 느낌마저도 식민화하는 세습 자본의 문제를 다루며 층층이 계급화된 한국사회의 모순과 긴장을 포착”(오은교 리뷰)하는 이 소설은 우리에게 ‘실패’를 둘러싼 진정성, 기분으로서의 실패라는 새로운 경지를 탐문하도록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