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무료한 대화로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천년 벗과를 대화를 나누리”
고전에서 길어 올린 천년의 지혜
공교롭고도 오묘하지요.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중략) 그대가 무인이 아니요 내가 농사꾼이 아니라서 함께 선비가 되었으니, 이야말로 크나큰 인연이요 크나큰 만남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고받는 대화가 구차하게 같거나 행하는 일이 구차하게 맞아떨어진다면, 차라리 천년 전 옛사람과 벗하고, 백 세대 뒤의 사람을 미혹시키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 본문 중에서
연암 박지원은 기묘한 인연으로 만난 벗이라 할지라도 그와 더불어 나누는 대화가 무료하고 함께하는 행동이 구차하다면 차라리 홀로 책 속에서 벗을 찾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진정한 친구란 그저 만나서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친구라면 함께하는 시간에 나누는 대화가 천박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함께하는 행동이 더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짧은 고전 글귀에 맑은 기운이 불쑥 찾아오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때, 수백 년 전 선인들과 만나는 순간이다. 직접 대면한다면 말도 뜻도 제대로 통하지 않을 과거의 사람들이지만, 저마다 자신만의 책 둥지를 틀고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벗할 수 있다.
이 책은 안대회 교수가 그동안 읽은 옛 책들에서 시선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것으로, 모두 5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 사람, 조선 사람을 비롯해 당나라, 베트남, 일본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는 그 한 편 한 편이 우리 사는 모습과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그저 한가로운 삶을 살았을 것만 같은 옛 선인들도 “인생의 만족을 꾀한들 어느 때나 충족되랴./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그게 진정 한가로움이지.” 하며 욕망으로 가득한 인생의 바쁜 질주에서 한숨 돌리고픈 소망을 노래했다. 무더위에 부채질도 하지 못하고 공부해야 하는 성균관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스스로를 “썩은 선비 신세”라고 자탄하기도 하고, 아들을 부잣집 딸에게 장가보내 덕을 보겠다는 익살스러운 시를 짓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현재 우리의 모습과 놀랄 만큼 비슷해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 사는 근본은 바뀌지 않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그런가 하면 유득공은 벼루에 심취한 나머지 친구의 명품 벼루를 무작정 들고 내빼고는 그런 취미 생활을 전문적인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 빼어난 문예 작품을 남기기도 하고, 원굉도는 객지에서의 적막감을 꽃병에 꽃을 꽂아 두고 보는 취미 생활로 극복하면서 “내뱉는 말이 무미건조하고 면목이 가증스러운 세상 사람은 모두가 벽(癖)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이서와 이광사는 모두 벼슬을 하지 않은 채 학문과 서법에 전념하여 탁월한 경지에 오름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했다. 이들은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출세에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자신을 사로잡은 일에 전심을 다해 몰두한 사람들이다. 수백 년 지식인들 중에도 오늘날 '마니아'들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서
한편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세숫대야를 비롯해 베개, 담배통, 거울, 신발, 문갑, 필통 등 온갖 일용 잡기를 만들 때 그저 아름다운 모양과 품질만을 따지지 않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의무를 기물명(器物銘)으로 새겨 넣은 선비들, 화급할수록 기지 넘치는 말을 구사하고 시를 통해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던 정치가, 개구리 울음소리에 밤잠을 설쳐 가며 개인의 소외와 고독에 대해 생각한 학자들의 모습은 깊은 감동과 울림으로 다가온다.
또한 심대윤 삼형제는 증조부가 이조판서를 지낸 혁혁한 명문가의 후예임에도 먹고살기 위해 소반을 만들어 파는 생활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직업의 귀천은 때에 따라 다릅니다. 장인을 지금 사람은 천하게 여기지만 훗날에는 귀하게 여길지 어찌 압니까?”라고 말했고, 황순승은 ‘황고집’이라 불리며 편협한 고집쟁이라는 빈정거림을 들었지만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고 원칙을 지켰다. 고려 때 노극청이란 사람은 아내가 현덕수라는 사람에게서 이문을 남기고 집을 팔자 아내를 나무라고는 이득 본 만큼을 현덕수에게 돌려주었다. 이들의 삶은 여전히 노동을 천시하는 잔재가 남아 있고, 현실주의라는 명목 하에 불의와 타협하고, 이익의 추구가 시대정신의 하나가 된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화와 삶이 곤고해질 때마다 우리가 고전을 들추어 보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