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사회 의식에 대한 문턱을 넘게 해주는 성찰적 사회비평 에세이
9년 만에 다시 내놓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의 개정판.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이름 없는 망명객으로 살았던 홍세화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면, 이 책은 그가 이후 자신의 책무로 삼고 있는 한국 사회를 향한 대사회적 발언의 첫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새로 부제로 붙은 ‘프랑스라는 거울을 통해 본 한국 사회의 초상’이라는 문구에서 보듯이 이 책 전반에는 저자가 프랑스와 한국을 비교하면서 한국 사회가 일상과 정치, 경제적 영역에서 좀 더 진보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애정 어린 충고가 담겨 있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개개인의 창조적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 시스템과 사라져야 할 일상생활에서의 권위주의, 그리고 법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사회정의’의 문제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저자가 본문 전체를 꼼꼼히 살펴보며 시의적으로 의미가 없거나,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했고, 2008년 현 시점에 기준을 두고서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무엇보다 지난 2006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최초고용계약법안 투쟁과 대부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통과되었던 한국의 2007년 비정규직 법안 통과 건을 비교하는 내용을 새롭게 수록하였다. [개정판]
<책 속으로>
한국의 각급 학교의 교감으로 계신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스럽지만 교감제도를 당장 없애라는 긴급 제언이다. 내 눈에 한국의 교감제도가 권위주의 제도라는 게 뚜렷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랜된 일이다. 그것이 꼭 프랑스의 각급 학교에 교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생긴 인식이 아니다. 내 판단으로 한국의 교감제도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거의 독소(毒素)와 같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자라는 세대들에 대한 교육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나는 강하게 주장하고자 한다. "교감제도를 당장 없애라!“고.
사르트르는 말과 글로 식민지의 반인간성, 반역사성을 강력하게 외쳤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알제리 독립자금 전달책으로까지 나섰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알제리인들이 각출한 독립지원금이 들어 있는 돈가방의 전달 책임자를 자원했던 것이다. 프랑스 경찰의 감시를 피해서 그의 책임 아래 국외로 빼돌린 자금은 알제리인들의 무기 구입에 필요한 돈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는 문자 그대로 반역행위였다. 당연히 사르트르를 법적으로 제재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골 측근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이에 대해 드골은 이렇게 간단히 대꾸했다. "그냥 놔두게, 그도 프랑스야!"
"배고픈 사람은 돈이 있든지 없든지 우선 먹어야 한다” 주인은 말했다. 그는, “돈은 나중에 채울 수 있지만 고픈 배는 나중에 채울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말은 너무 옳았다. 북한 어린이들의 주린 배도 기다려주는 것이 아니어서 나중에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은 기다려줄 수 있다.
회색의 돈은 법의 제대를 피할 수 있는 대신, 받는 사람에게 수치심을 요구한다. 예컨대 대부분의 교사가 부임 초기에 ‘봉투’를 받을 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게 바로 수치심이다. 그런데 이 수치심엔 면역성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수치심은 없어지고 회색의 돈은 점점 깨끗한 돈인 것처럼 인식된다. 나중에는 아예 회색의 돈을 요구하기까지 이른다.
내가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수학과 글쓰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토론과 만나고 한 가지 생각해본 것이 있는데, 한국의 논평에서 흔히 보는 양비론이었다. 한국의 신문 칼럼니스트를 비롯한 논평자들은 양비론을 무척 애용한다. 그들을 ‘비판적 기회주의자’들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주장을 분석하면, 결국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에 ‘비판’을 더한 것이 된다. 산술적으로 표현하면, ‘양비론=양시론+비판’이 되는 것이다.
영어몰입교육은 성공할 수 없지만, 설령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을 미국인이나 미국 사회구성원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영어몰입교육을 발상한 위정자들은 인문적 소양이 경제동물의 수준에 머문 사람이거나 이미 미국인이 돼버린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다이거나다. 그들이 광우병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 쇠고기 수입을 완전 개방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똘레랑스에 붙이는 두 번째 사족은 과연 "우리는 한국의 극우세력에게 똘레랑스를 보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관련된다. 미리 답하자면, 한마디로 "아니다!" 이다. 극우는 극단주의의 하나이기 때문에 항상 앵똘레랑스(intolerance, 똘레랑스의 반대말)를 불러온다. 똘레랑스가 앵똘레랑스에 똘레랑스를 보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이 질문과 대답은 사족이 되는 것이다. …… 극우세력 자체가 갖고 있는 이념적 불투명성 때문에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지금까지 한국의 극우세력은 스스로 극우라 칭하지 않았고 보수라 칭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라고 자처했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바이지만, 극우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흘러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는 제멋대로여서 극우와 자유민주주의 사이를 마음대로 왔다갔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극우와 자유민주주의자로 구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보수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에서도 극우와 자유민주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기쁜 마음으로 똘레랑스를 보여주고 극우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일관되게 행해지는 반노동자적 의식화로 한국사회구성원의 의식세계 안에는 ‘노동은 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에 맞서 ‘일하기 좋은 나라’를 제기할 줄 모르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은 완성되고 비정규직 법안에 무덤덤하게 된다.
알아야 한다. 지금 설령 정규직이라 할지라도 반동의 칼이 언제 나에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오늘의 굴종이 내일 나를 향한 칼날을 가는 행위가 된다는 점을. 지금 비정규직에 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내 자식에게 피눈물 흘리게 하는 내일을 물려주게 된다는 점을. 우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하는 까닭은 자명하다. 노동자들에겐 돈도 없고 권력도 없다. 단결과 연대이외엔 무기가 없다. 단결과 연대는 나 자신을 위해, 내 자식을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노동자들이 가진 유일무이한 무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