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트 앤솔러지는 작가별 또는 주제별 작품집 형태를 추려서 꾸린 시리즈입니다. 기존에 출간한 단편선들을 포함하여 지속적으로 고전 장르의 지형을 탐색하려고 합니다. 출판 브랜드 '바톤핑크, 아라한, 지구라트'의 조합어인 '바라트'는 산스크리트어로 '빛을 찾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번 앤솔로지는 그동안 '러브크래프트 서클'을 통해 소개해온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코스믹 호러 단편들을 수록합니다. 호지슨은 잘 알려진 대로 러브크래프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작가 중에 한명입니다. 호지슨은 코스믹 호러의 기점이면서 러브크래프트와 함께 전기를 마련했는데요. 이뿐 아니라 바다를 배경으로 창조해낸 독특한 해양 크리처들은 러브크래프트를 포함하는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한밤의 목소리」는 호지슨의 특징이 잘 녹아든 단편입니다. 자연의 공간 이면에 숨은 존재를 드러내는 분위기와 암시가 인상적인데요. 이 단편의 균류 인간은 호지슨 자신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할 뿐 아니라 이후 다른 작가들의 유사 크리처는 물론 영화와 만화 등의 캐릭터에도 영감을 줍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 범선의 일종인 스쿠너 한 척이 정지해 있습니다. 밤의 어둠 속에서 별안간 이 스쿠너를 향해 조용히 다가오는 노 젓는 소리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요. 이 목소리의 은밀함과 의뭉스러움은 어둠 속 바다 한복판이라는 상황에서 스쿠너의 선원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심어주기에 충분합니다. 호지슨은 거대한 공포 앞에 놓인 인간을 향해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요. 이 단편의 연민과 공감, 다음에 소개하는 「폭풍으로부터」의 냉정함이 그 예일 겁니다.
이 단편은 1963년 혼다 이시로 감독의 「마탄고Matango」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는데요. 이 마탄고는 늪지 인간을 다룬 더그 휠러의 DC 코믹스 『늪지의 괴물 Swamp Thing』에서 캐릭터를 이어갑니다.
「폭풍으로부터」에서도 호지슨은 흥미로운 해양 크리처를 선보입니다. 호지슨의 바다는 냉혹한 공포의 공간입니다. 이 공간에선 조물주가 신이 아니라 그것 즉 괴생명체가 신입니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가 잠들어있고 심해인 ‘디프원’이 숨 쉬는 바다보다도 더 무자비한 환경인데요. 짧은 분량의 「폭풍으로부터」는 괴생명체의 공격을 받은 난파선과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립니다.
앞서 소개한 「한밤의 목소리」와 사뭇 다르게 호지슨은 거대한 공포에 처한 인간의 하찮음과 무력함에 연민을 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밑바닥을 극단까지 드러내고 비열함을 낱낱이 까발리는데요. 이것이 독자들에게 더 익숙한 호지슨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괴물의 파괴적인 촉수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마는 어린 자식의 손길을 뿌리칩니다. 연인들은 서로를 죽이고 피난처에 먼저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찮은 인간성마저 매몰되는 호지슨의 바다는 괴물들의 근원이자 그 자체가 거대한 괴물로 은유되는 공간입니다.
「트로피컬 호러」도 호지슨의 해양 크리처를 잘 보여줍니다. 호지슨의 가장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요. 신인 작가 시절에 쓴 단편이라 이후 완숙한 시기의 작품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다시 말해 후반기의 작품에 비해 묘사가 직설적이고 간결합니다. 평가는 엇갈리지만 많은 앤솔러지에 단골로 수록되는 호지슨의 인기작 중에 하나인데요.
이 단편에 등장하는 크리처는 거대한 바다뱀에 비유됩니다. 해양 괴물치고는 그리 새로운 발상은 아닌데요. 더 정확히는 거대한 장어와 유사합니다. 날카로운 이빨과 촉수들이 있는 거대한 입, 나무통처럼 두툼한 몸뚱이를 끝없이 말고 있어서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힘든 거대 괴수인데요.
견습 선원 생활을 했던 작가의 경험이 반영된 단편이기도 합니다. 화자도 19세의 견습 선원입니다. 멜버른 항을 출항하여 런던으로 귀항 중인 ‘글렌 호’ 선상으로 정체모를 괴생명체가 침입합니다. 화자는 자기보다도 어린 또 다른 견습 선원 ‘조키’와 함께 야간경계를 하다가 그 괴물과 맞닥뜨립니다. 이때부터 장장 3일 동안 이 배는 괴물의 인간사냥으로 초토화되고 피로 물듭니다.
「위드맨The Weed Men」은 장편 『글렌 캐리그 호의 구명보트』의 일부인데요. 이 장편에 대해 러브크래프트는 전반부의 음울한 위협감만큼은 압도적이라고 평했다죠. 난파선에서 두 척의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한 승객과 선원들이 겪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담고 있습니다.
‘위드맨’은 움직임은 하얀 달팽이, 모습은 알몸의 인간을 닮은 괴생명체입니다. 위드맨이라는 단어적 의미는 ‘해초 인간’에 가까운데, 이들의 서식지가 해수면에 떠있는 거대한 부유 해초대(帶)이기 때문이고 사지 말단부에는 촉수 다발이 달려 있는 또 다른 특징 때문이기도 하죠. 인간 달팽이, 해초, 촉수 등 여러 가지 이미지가 복합된 이 독특한 크리처는 특유의 지독한 악취까지 풍겨서 여러모로 가까이하기 힘든 비호감 변종입니다. 위드맨은 나무 돌연변이, 균류 인간, 거대 게, 거대 문어, 거대 해양파충류 등과 더불어 호지슨의 대표적인 해양 크리처인데요.
난파선의 갑판장을 중심으로 한 일인칭 화자(존 윈터스트로) 일행은 북대서양 사르가소(Sargasso Sea) 해상을 표류하다가 거대한 부유 해초대를 지나는데, 여기서 이 위드맨과 마주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구명보트 위로 침입한 개체 하나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이 부유 해초대에 바글거리는 그 수가 압도적이었지요. 일행이 해안가 작은 만의 절벽으로 피신한 이후 이 위드맨들이 떼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이로써 위드맨과 난파선 생존자들의 일대 결전이 벌어집니다.
윌리엄 호프 호지슨은 러브크래프트의 미리보기일 때가 많습니다. 「유령선」도 20년 미리 보는 『광기의 산맥』이고 「우주에서 온 색채」가 아닐까 싶은데요. 호지슨이 선원 생활을 하면서 체감한 바다는 생명의 원시성과 대자연의 힘을 가장 날것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 생명과 자연은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작가 호지슨은 글 쓰는 여정에서 그 근원과도 같은 바다로 자주 회귀합니다. 차원의 경계를 넘나들고 오컬트의 영적 세계를 오가다가 홀연히 바다로 돌아오곤 하는 데요.
호지슨이 돌아온 오늘의 바다는 육식 균류(곰팡이)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어느 새 문학과 영화 등에서 클리셰가 된 촉수와 균류는 100년 전의 러브크래프트에겐 호지슨을 향한 오마주였겠지요. 이 곰팡이 괴생명체는 무기물에서 발생한 생명의 한 예입니다. 이 자연발생설은 화자인 늙은 의사의 믿음이자 이 단편의 토대인데요. 선의(船醫)가 탄 선박의 이름이 ‘베오스프세 Bheospse’인데, 자연발생설의 토대인 ‘비오포이에시스 biopoiesis’를 떠올리면 작품의 포석이자 선언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역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호지슨 당대에도 이미 오류가 증명된 자연발생설이라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매력적인 창작의 모티프였나 봅니다.
의사 시험을 막 통과한 풋내기 의사인 화자는 중국행 쾌속 여객선에 선의로 승선합니다. 마다가스카르를 경유한 후에 강력한 폭풍을 만나 선박에 큰 손상을 입는데요. 선박을 수리하고 정비하는 과정에서 버려진 지 2백년은 됨직한 폐선 즉 유령선과 조우합니다. 호기심에 이 유령선을 탐사하던 선원들이 발견한 것은 선박을 뒤덮은 놀라운 곰팡이입니다. 이 발견의 보상은 충격과 공포입니다. “배가 살아있어!” 선장의 말로 대변되는 이 유령선은 화학식을 통해 무에서 탄생한 생명의 장이자 인간이 잡아먹히는 식인 지옥의 한복판인데요. 이 살기와 위협의 바다에서 호지슨은 가장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바다의 악마들」은 바다표범을 닮은 괴생명체를 다룹니다. ‘악마들’이라는 표현이 순하게 느껴지는 비주얼인데요. 항해 중인 한 선박에서 해저 지진을 감지합니다. 해저 지진에 이어 수온이 급속도로 상승하고 짙은 안개는 물론 수면에 기포들이 생겨납니다. 이 선박의 견습 선원인 화자는 기괴한 소음에 이어 수중에서 솟았다가 사라지는 괴생명체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선장을 비롯해 선원들이 화자의 말을 좀처럼 믿어주지 않는데요.
안개가 조금 걷히면서 갑자기 나타난 대형 범선 한 척. 서서히 드러나는 이 범선의 갑판을 기어 다니는 괴생명체들. 그것들이 돛이 네 개인 그 거대한 범선을 공격하여 승무원들을 모두 죽이고 배를 점령한 것 같습니다. 물론 다음 차례는 화자가 탄 선박이겠지요. 네, 벌써 바다로 뛰어든 놈들이 촉수를 득시글거리면서 헤엄쳐 오고 있군요.
「돌로 만든 배」는 ‘해양 크리처’를 주제로 그동안 소개해온 호지슨 작품들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화자로 내세운 견습 선원(또는 하급선원), 망망대해에서 맞닥뜨린 불가사의한 난파선 또는 표류선, 바다의 괴생명체, 인간이라는 존재를 압도하는 거대한 미지의 공포 그리고 바다로 무대를 옮긴 음산한 고딕 분위기까지.
오래 전에 범선 ‘앨프레드 제솝’ 호의 선원이었던 화자가 당시 항해 중에 경험했던 괴이한 일을 들려줍니다. 공포와 미스터리는 대서양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물소리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소리로부터 시작되는 호지슨의 전형적인 패턴인데요. 대서양 한복판에서 끝없이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선장은 지원자들을 뽑아 구명보트를 타고 그 소리를 향해 갑니다. 그 익숙하고도 기괴한 소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함인데요.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그들이 마주한 것은 돌로 만든 배. 진상은커녕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호지슨은 이 미지의 신비와 공포를 어떡해서든 설명하고 입증하려고 하는데요. 어딘지 그래야한다는 강박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독자들이 호지슨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만족하겠지만 아니라면 실망이나 또 다른 미망에 빠질 것 같습니다. 아마도 호지슨 당대의 특징 중 하나 요컨대 초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풍조의 한 단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26년 봄
미스터 고딕 정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