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할 때는 서로 너무 좋아서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듯 보여도 하나씩 둘 사이의 다른점이 눈에 띄고 마침내 상대방을 참을 수없게 되는 순간. 특히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맞추고 살기 어려울 듯. 이야기의 화자인 제러미의 장인과 장모 버나드와 준은 합리주의자와 신비주의자, 활동가와 기권자, 과학자와 직관론자로 서로 정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는 현실에서 선과 악, 사랑과 증오, 과학적 사고와 영적인 통찰 사이를 오가는 두 사람 사이의 안타까운 대립상황을 보여준다. 특히 악령처럼 나타난 검은 개의 존재는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개인들의 갈등이라는 이야기를 전면에 드러내고 있지만 사실은 전쟁의 잔혹함과 야만성을 돌려말하고 있는 소설.
어릴 때 사고로 고아가 된 후 줄곧 다른 사람들의 부모에게 집착해온 제러미는 장인과 장모인 버나드와 준 트리메인 부부에게 강렬하게 매료된다. 냉철한 이성주의자와 종교적 은둔자인 두 사람이 평생 반목하면서도 결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기이하겨 여겨 두 사람의 삶을 회고록에 담아내기로 결심한다. 준이 입원한 교외 요양원, 장벽 붕괴 소식에 흥분한 버나드와 동행한 베를린에서 그들 각자에게 이야기를 듣는다. 따로따로 듣는 그들의 기억은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1944년 런던에서 처음 만나 전쟁이 끝나고 결혼한 버나드와 준은 모두 열정적인 공산주의자둘이었으나, 신혼여행 직후 각각 서로의 차이를 직감하며 다른 길을 걷는다. 속세와 단절된 채 영적인 탐구에 몰두하는 준과 달리 버나드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공산당을 떠나면서도 냉철한 이성과 완벽한 사회질서에 대한 믿음을 굽히지 않은 채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준은 냉정한 버나드의 맹목적인 합리주의, 사회개혁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오만한 고집에 소름끼쳐한다. 자신들의 딸이 그가 함부로 다룬 곤충들의 복수로 인해 육손이로 태어난 것이 그녀의 믿음에 확신을 준다. 반대로 버나드는 사회적 책무를 저버린 준의 배신과 뭐든 잘 믿는 듯한 성향을 못 견뎌한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한 채 별거를 계속해나간다.
신혼여행 중 프랑스 남부의 인적 없는 산길에서 두 마리 검은 개를 만나게 되고, 이를 악과 조우한 후 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초월적인 세계에 눈을 떴다는 준, 그것은 굶주린 들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코웃음치는 버나드. 결국, 당나귀로 착각할 만큼 큰 덩치와 붉은 눈의 그 개들의 정체는 나치 점령 당시 레지스탕스 색출에 이용되었다가 전쟁이 끝나자 버려진 게슈타포의 경비견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준은 그 개들을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타락하고 추악한 본성이라고 말한다. 이를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의 아이들이 해를 입게 될 것이며, 아무리 느리더라도 우리 스스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라는 당부를 한다.
제러미는 전쟁이후 이렇다 할 대의도, 원칙도, 사상도 없어 뒤섞여버린 모든 가치가 혼재하는 시대를 관조하며 장모가 죽기 직전까지 보았다던 검은 개들의 존재를 생각한다. 소설이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일그러진 문명에 맞서는 개개인의 초상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는 연민이 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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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마음, 정신, 영혼, 의식, 뭐라고 부르든 그것은 결국은 우리가 개선해나가야 하는 거야. 그것을 발전하고 확장해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비참함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테니까. 내가 발견한 작은 사실은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거야. 우리에겐 그럴 힘이 있어. 내면세계의 혁명 없이—아무리 느리다고 해도—거창한 설계가 다 무슨 소용이야.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
검은 개 | 이언 매큐언, 권상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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