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욱이 돌아왔다!
『아내가 결혼했다』 이후 18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얼마든지 영원할 수도, 순간적일 수도 있을
30대의 리얼 (환승) 연애담
소설가 박현욱이 장편소설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하지 않아』로 돌아왔다. 마지막 출간(『그 여자의 침대』)으로 따지자면 16년, 마지막 장편소설(『아내가 결혼했다』)로 헤아리자면 18년 만의 신작이다. 그간 박현욱이 그려온 ‘연애로 성장하는 인물’ ‘사랑으로 살아가는 시절’ ‘아이러니로 완성되는 이야기’에 한 번이라도 매료된 적 있는 독자라면, 신작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하지 않아』는 앞엣것을 모두 충족하는 동시에 한층 더 깊어진 관계에 대한 시선과 곱씹을 거리 가득한 문장을 만나볼 기회가 될 것이다.
“야하면서도 건전하고 불순하면서도 순수한 젊은 호흡”(박완서)이라는 데뷔 당시의 평은 그때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나 내보이는 이번 작품에도 고스란히 입혀주고 싶은 문장이다. 오랜 침묵을 깨고 선보이는 이야기에서 작가의 시작점이자 아이덴티티를 발견할 수 있기에,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하지 않아』는 다시 가동될 박현욱 월드의 리부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기존의 박현욱을 수식하는 신선함과 재기 발랄함 옆에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가 새로이 등재되어야 할 듯하다. 이는 그간 ‘입담’이라고 표현되어온 박현욱식 문장이 더욱 차분해져 꾸밈없어진 때문이기도, 이번 소설 속 인물들이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데서 기인하기도 한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폴리아모리라는 낯설고도 파격적인 소재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한 박현욱의 ‘셋이서 추는 왈츠’는 신작에서도 계속된다. 그러나 이번 연애담은 ‘평양냉면’처럼 은은하고 중독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 만나든 항상 오늘 만나는 거예요. 우리가 다음에 만난다 해도 그날이 되면 또 오늘이에요.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아요. 같이 가요.”(14쪽)
“듣기 좋아요. 한번 더 말해봐요.”
“나는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홀로 하는 독백, 둘만 아는 디졸브
셋이 추는 위태롭고 아름다운 왈츠
2015년 봄의 저물녘, 마포구 합정, ‘태주’는 그곳에서 대학 동창 ‘재하’를 몇 년 만에 우연히 마주한다. 동창 중에 “가장 빨리 결혼했고, 가장 빨리 이혼했”(11쪽)으며 부동산으로 돈까지 많이 번 재하 옆에는 늦은 오후의 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명’이 있다. 태주는 이 갑작스러운 만남이 지난날의 재하처럼 달갑지 않지만, 그래서 “오늘 말고 다음에요”(14쪽)라고 둘러대며 얼른 자리를 뜨려 하지만, “다음에 만난다 해도 그날이 되면 또 오늘이에요”라고 말하는 명의 우아한 농담에 완전히 넘어가버리고 만다. 재하와 명은 납치라도 하듯 태주의 팔을 하나씩 낚아채고 어째서인지 태주는 일순 “행복 비슷한 것을 느”(같은 쪽)끼며 그들을 따라간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밤의 술자리 이후 셋은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연인인 명에게 “태주 어때?”(33쪽) 하며 은연중에 과시와 도발을 하는 재하가 못마땅해 태주는 매번 빼기 일쑤지만, 명의 한마디면 어느새 못 이기는 척 나가 그들과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오네스코의 문장을 빌리자면 “인생 경주에서 물러나야” 하는 나이 서른다섯, “또다시 태주는 재하에 대해 부러움 이상의 부러움을”(27쪽) 느끼며 사랑의 경주가 시작될지도 모르겠다고 예감한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고 있다는 남자 태주와 “송어 낚시 책보다 더 좋은 게 있”(40쪽)다며 90km를 달려 송어회를 먹으러 가는 남자 재하. 세 사람이 함께하던 어느 토요일, 급작스러운 일로 재하가 자리를 뜬 뒤 명과 태주는 뜻밖의 동물원 데이트를 시작으로 마법 같고, 꿈결 같고, 낭만적인 밤을 맞이한다.
태주는 명의 말들이 이미지가 되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벚꽃이 흩날리는 장면에서 밤하늘에 벚꽃이 휘날리는 장면으로, 그리고 또 까만 밤하늘에 높디높은 궁궐의 담 위로 더 높이 희고 고운 꽃잎들이 춤을 추는 장면으로.(53쪽)
태주는 뭔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욕구였다. 뭔가에 대한 갈망 비슷한 것이었다. 어쩌면 잡힐 듯,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바람에 멀리 날아가 사라져버리는 벚꽃 잎들 같은 것들에 대한.(68쪽)
“아무렇게나도 좋지만 어떻게든 나하고 같이 가봐요.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의 방식으로 같이 가봐요. 어떻게든.”
불꽃놀이가 되는 꽃놀이, 눈송이가 되는 꽃송이
“디보스드(divorced)”라는 재하의 말에 “미 투”라는 명의 대답으로 시작된 이 ‘돌싱’들의 연애 관계는 “오랫동안 서로에게 편안함을”(76쪽) 느끼며 지속되었지만, 새로운 사랑이 탄생하면서 끝을 맞이한다. 태주는 “여러 날 동안, 오랫동안, 어쩌면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담아두었던 말” “내가 명을 좋아해”(80쪽)라고 재하에게 고백한다. 재하는 “태주를 줄 위에 올려놓고 싶은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야말로 줄 위에 있었”고, “떨어진 사람은 자신뿐”(86쪽)이라는 걸 자각한다. “스스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명을 사랑했”(85쪽)다는 사실 역시 깨닫지만 단호한 명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런 게 아무렇지 않을 때도 있고 신경이 쓰일 때도 있어. 아무렇지도 않아서 헤어질까 하는 때가 있었어. 재하씨에게 도무지 마음이 없어서. 그러다가도 신경이 쓰여서 헤어질까 하던 때도 있었어. 마음이 있다 해도 다른 여자 만나는 애인과 계속 만날 수는 없으니까. 이럴 때는 저럴 때를 생각하고 저럴 때는 이럴 때를 생각해. 그러면 굳이 꼭 지금 끝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와. (…) 그런데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됐어. 이렇다 해도 헤어져야 하고 저렇다 해도 헤어져야 해. 우리는 여기까지야.”(84~85쪽)
반면 봄날의 꽃놀이에서 시작된 태주와 명의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하고, 태주는 “‘우리’라는 말이 반짝거리는 것처럼”(100쪽) 느껴진다. 그러니 함께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아무렇게나 내린 커피를 두고도 이들은 이런 대화를 나눌 수밖에. “아무렇게나도 좋지만 어떻게든 나하고 같이 가봐요. (…) 우리도 우리의 방식으로 같이 가봐요.”(99쪽) 명 역시 연인과 해보고 싶었던, 같은 책의 같은 대목을 소리 내어 번갈아 읽는 시간을 태주와 가지면서 새롭게 다가온 사랑을 한껏 감각한다.
사랑이 사랑의 말을 만들었다. 사랑의 말이 사랑을 만들었다. 기의가 기표를 만들었고, 기표가 기의를 만들었다. 명에 대한 사랑이 사랑의 발화를 만들었지만 사랑의 발화는 명에 대한 사랑을 더 깊게 만들었다.(90쪽)
생각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특정 상황에서 같은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생각의 경로가, 감정의 경로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명의 언어는 태주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같은 집의, 같은 세계의 인간인 것이다.(111쪽)
그러한 지복의 순간도 잠시, 명이 기르는 고양이 ‘앨리스’로 인해 태주에게 알레르기 증상이 발현되면서 이들의 관계에도 조금씩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게다가 앨리스의 분리 불안 탓에 “명의 집에서 밤을 보낼 수도, 태주의 집에서 밤을 보낼 수도 없”(119쪽)는 상황에마저 놓이고 만 것. 태주는 처음에는 “재하도 물리쳤는데” “앨리스는 괜찮아”(114쪽)라며 알레르기 약과 면역 요법을 동원하여 극복해보려 하지만, 재하가 여름휴가를 떠나며 명에게 맡겨놓은 또다른 고양이 ‘하나’를 발견하는 순간 “고양이도 고양이지만 재하에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135쪽)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욕망에 대한 욕망이란 처음의 욕망과는 다른 욕망이다. 처음의 욕망은 충족되어 사라졌거나 이미 희미해졌다. 다른 욕망은 아직 생성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뭔가가 있다. 그것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무엇, 러시아적 권태–토스카다.(145쪽)
말수 없는 태주와 두말 않는 명의 사랑은 기로에 선다. 그리고 할말 없는 재하의 흔적은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열망은 신체적 핸디캡을 넘어서지 못”(139쪽)할까? 정말 “한눈에 빠지는 사랑과 일 년 만에 빠지는 사랑이 다른 것일까. 한두 달 만에 마음이 식는 것과 일 년 만에 마음이 식는 것이 다른 것일까.”(152쪽) 중요한 것은 이들의 사랑은 아직 미결정의 상태로, 잠재태인 채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일 테다. 그리고 이 이야기와 인물들 속에 우리 지난날의 한 조각도 숨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무심한 듯 치밀한 이 사랑은 이 소설과 꼭 닮았다. 두 남자와 한 여자라는 구도의 측면에서 『아내가 결혼했다』의, 『안나 카레니나』라는 주요 모티프를 공유하는 동시에 깊이 있는 아포리즘이 산재한다는 측면에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변주로도 읽히는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하지 않아』.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지극히 리얼하고도 자연스러운 ‘환승 연애’의 순간이, 설렘과 파토스가 흘러넘치는 어떤 사랑의 생애가 이 소설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얼마든지 영원할 수도, 얼마든지 순간적일 수도 있을 30대의 연애. 그 현실적 연애의 질감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박현욱이 그려낸 이 사랑의 화신들을 만나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