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되거나,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탈식민화 이후 혼돈 가득한 아프리카
낯선 땅에서 끝없는 이주를 감행하며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고자 했던 한 인간의 민낯 그대로의 삶
탈식민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정확하고 압도적인 문장으로 파괴와 폭력을 그려내면서도 인간의 연대와 따뜻함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으며 2018년 대안 노벨문학상인 뉴아카데미문학상을 수상한 마리즈 콩데의 자전에세이 『민낯의 삶』이 출간되었다. 파리10대학교, UC버클리, 하버드대학교, 컬럼비아대학교 등에서 프랑스어권 문학을 가르치며 열여덟 편의 장편소설과 수많은 희곡과 에세이를 남기고 2024년 4월 세상을 떠난 마리즈 콩데가 홀로 첫아이를 출산하고 작가로 성장해나가는 청장년기의 삶을 담은 작품이다. 고향 과들루프를 뒤로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난 아프리카에서 마리즈 콩데는 교육자, 지식인, 어머니, 여성, 이방인으로서의 지난한 인생 여정을 ‘민낯 그대로’ 펼쳐놓는다.
1958년 배우 마마두 콩데와 결혼 후 마리즈 콩데는 역경 속에서 네 아이와 함께 코트디부아르, 기니, 가나, 세네갈 등으로 이주하며 억척스러운 삶을 꾸려나간다.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의 다양한 지식인, 정치인들과 교유했던 일화와, 탈식민화 이후 독재 치하의 혼돈 가득한 아프리카 여러 국가의 급박하고 위태로운 정세가 생생히 담겨 있다. 독재정치, 쿠데타, 물자 부족 등 식민 시대 이후 아프리카의 모습은 우리의 현대사와도 닮아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진실을 향한 강렬한 열정으로 빚어낸 민낯 그대로의 자기 고백록
“한 여자의 완전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
왜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는 모두 반쪽짜리 진실들의 잡동사니로 귀결되고 마는가? 왜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너무나도 빈번하게 상상의 구조물이 되어버려서, 단순한 진실의 표현은 희미해지다가 사라지고야 마는가? 왜 사람은 그토록 자신의 실제 삶과는 다른 삶을 산 것처럼 그리기를 갈망할까? (11쪽)
마리즈 부콜롱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과들루프섬에서 여덟 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피부색에 비해” 학업 수준이 높았던 부모 덕분에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성장과정에서 프랑스 본토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고등교육을 위해 부푼 꿈을 안고 파리로 유학을 떠나지만, 입시를 준비했어야 할 시기에 홀로 긴 임신 기간을 견뎌 1956년 첫아들 드니를 출산하며 독신모가 된다. 아이의 친부이자 훗날 조너선 데미가 감독한 다큐멘터리영화 <농학자>의 주인공이 되는 아이티 언론인 장 도미니크는 콩데의 임신 사실을 안 다음날 불안정한 자국 정세를 핑계로 곧장 아이티로 돌아가버린 터였다. 그후 장 도미니크는 엽서 한 장 부치지 않았다. 어린 마리즈는 임신한 채 남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흑백 혼혈인 장 도미니크가 완전한 흑인이었던 자신을 경멸했기에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인식한다. 그 무렵 가족들에게서도 지원이 끊긴다.
“어머니에게 빛의 도시, 세계의 수도”였던 파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타자성을 폭력적으로 발견했던 곳”이자 “흑인이라는 생생한 체험”을 한 도시였다. 마리즈는 “상처 입고 모욕을 당했다. 마음과 자존심이 상해 고통스러웠다. 나는 낙오자가, 불가촉민이 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이 년 후인 1958년 기니 출신의 배우 마마두 콩데를 만나 결혼하여 콩데라는 성을 얻는다. 작가는 이 시기의 일화부터 인생의 변곡점마다 자신의 상처와 과오, 역경, 모성, 욕망, 기쁨, 환희, 그리고 역사적 사실까지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단 한 순간도 자기변명을 하거나 자신을 훌륭한 인물로만 그리지 않으며, 일말의 윤색 시도를 거부하고 진실에 열정적으로 매달린다.
나의 근원을 찾아 떠난 아프리카,
그곳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끝없는 이주
이중의 이방인, 교육자, 지식인, 어머니, 여성으로 살아가기
내가 시도해보려는 건, 나의 존재와 상상계에서 아프리카가 차지하고 있는 중차대한 자리를 가늠해보는 일이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찾았던가? (17쪽)
마리즈 콩데는 이내 남편 마마두 콩데와 불화하고, 아들 드니를 데리고 아프리카로 떠난다. 평생 프랑스 본토 백인들의 문화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으나 결국 자신의 “뿌리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남긴 프랑스를 떠나 새로운 땅에 정착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의 중학교에 프랑스어 보조교사로 채용되어 첫발을 내디디지만, 자신이 온전히 발붙일 곳이라는 예상과 달리 아프리카에서 마리즈 콩데는 환영받지 못한다. 프랑스에서는 짙은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피부색도 문화적으로도 프랑스인과 가깝다는 이유로 질투받고 배척당한 것이다. 아버지가 사망하며 고향 과들루프와의 연결마저 끊긴 콩데는 이중의 이방인이 된 채, 1960년 마마두 콩데와의 사이에 큰딸을 출산하고 남편의 고국인 기니로 향한다.
“프랑스령 아프리카 국가 중 사회주의혁명을 이루었음에 자부심을 느끼는 유일한 국가” 기니에서의 삶은 지루함의 연속이다. 낯선 언어, 이슬람 문화, 여성을 배척하는 분위기 속에서 물자 부족, 공무원들의 착복까지 더해져 생활은 녹록치 않다. 1961년 기니의 열악한 환경에서 셋째 아이샤를 출산한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네번째 임신 사실을 알고는 좀더 나은 환경을 찾아 세네갈 다카르로 향한다. 출산 후 다시 기니로 돌아오지만, “명백하게 가장 무해해 보이는 사람들이 실종되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투옥”되는 등 독재자 세쿠 투레의 악행이 날로 심해져 결국 다시 기니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마리즈 콩데는 아프리카에 머무는 십여 년 동안 아이들과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며,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을 시작으로 기니 코나크리와 카마옌 세네갈 다카르, 가나 아크라, 영국, 세네갈 등을 오가며 끝없이 이주한다. 새로운 땅에서도 여러 친구, 유력 인사,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는 남자 들의 도움으로 끈질기게 교육, 언론계 일자리를 얻어 자신의 손으로 네 아이들을 먹여 살리며 억척스레 삶을 꾸려나간다. 비판받을 만한 어머니, 욕구불만 상태의 여성으로서, 마리즈 콩데는 탈식민화된 아프리카를 통과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궁지에서 벗어나며 자신의 길을 낸다. 그리고 어느 날 글쓰기가 그녀 자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
독립 이후 독재 치하 아프리카의 혼란한 초상
두 개의 선율선처럼 어울리는 개인적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
『민낯의 삶』은 흑인과 여성을 위해 투쟁해온 마리즈 콩데가 들려주는 이중의 이방인, 교육자, 지식인, 어머니, 여성으로서의 지난한 삶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1950년대 말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된 아프리카 여러 국가의 초상으로도 읽힌다. 마리즈 콩데는 기니의 세쿠 투레,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같은 ‘아프리카 독립의 아버지’들을 비롯해 정치인, 사회운동가, 문화 예술인들과 교유하고, 기니의 ‘교사들의 음모’ 사건에 연루되거나, 적성국 기니의 스파이로 몰려 가나에서 추방되는 등 혼란한 아프리카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특히 마리즈 콩데는 출판물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교사들의 음모’ 사건 등에 대해서도 생생히 기술한다. 기니 독재자 세쿠 투레가 전국교원노조 책임자들에게 기니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는 음모를 씌운 사건으로, 세쿠 투레가 숙청에 나선 것은 숙적인 페울족을 제거할 목적이었음은 자명하며, 노조 책임자들은 “공교롭게도 대부분이 페울족이었다”. 세쿠 투레는 무장군인들을 학교로 침입시켜 반대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도 폭력을 가하고, 노조 책임자들뿐만 아니라 학생들까지 체포하여 투옥하고 고문했다. 세쿠 투레는 이후 이십육 년간 장기 집권하며 수만 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폭압적인 독재자가 되는데, 이는 우리의 뼈아픈 현대사와도 겹쳐 보여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