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콘텐츠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이제 내 장면은 내가 책임지라는 거겠지”
미숙했던 시절이 나를 조롱하지 않도록, 일정한 모양 속에 갇히지 않도록,
제 목소리로 이루어진 집을 허물고 또 허물며
언제나 장르가 다른 핑크를 꿈꾸는 시
밝음 속에 깃든 간절함의 색채, 이예진 첫 시집 출간!
문학동네시인선 236번으로 이예진의 『장르가 다른 핑크』를 펴낸다. “선명하고 정직”한 언어로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진술들”과 “괄목할 만한” 이미지를 펼치며 “가계와 욕망과 폭력 같은 유구한 것들의 민낯을 기록”한다는 심사평을 받으며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시인의 첫 시집이다. 그간 시인이 부지런히 발표한 시 50편이 엮인 『장르가 다른 핑크』에는 자신을 “테두리가 없는 퍼즐 조각”(「지진 파티」)으로 인식하는 화자가 “일정한 모양의 퍼즐 조각이 되기를 요구하는 세계”에 “포획되지 않겠다”(해설, 김미정)고 선언하는 의지 어린 목소리가 담겨 있다. ‘학교’ ‘선생님’ ‘선배’ ‘아버지’ 등으로 표상되는 세계로부터 가해지는 규율과 억압에 부대끼며 “수시로 말이나 감정을 삼키는”(해설) 이예진의 시 속 화자는 대개 여자아이, 혹은 그런 여자아이가 성장한 성인이다. 동세대의 여성과 ‘언니’로 대표되는 선대 여성의 모습을 성찰하는 시선으로 그려낸 이번 시집을 문학평론가 김미정은 “특정 세대 여성으로서의 자기 맥락을 섬세하게 포착한 자문화기술지(autobiography)의 일종”이자 “한국 문화예술에서 약진해온 여성 성장물의 계보를 잇는 시집”이라고 평한다. 『장르가 다른 핑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한 번이라도 불화해본 이라면, 자신의 미래를 언제나 다른 색깔로 칠하고 싶어하는 이라면 누구든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방과후 실험관찰 친구들은 금붕어를 액체질소에 담가본 적이 있다 드라이아이스를 삼키면 서로를 오래도록 기억할 거라는 말을 하며 웃었다 수업을 째고 눈사람을 만들러 간 선배 둘이
눈이 되어 돌아왔대
전자레인지의 문을 열고
이 안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
머리를 들이밀었다
얼었던 것을 녹이기 위해 빛은 회전할 것이다
우리가 믿었던 선생으로부터
사랑과 우정을 이런 식으로 배울 줄은 몰랐지
(…)
어느 날 선생은 우리 모두에게 눈을 감으라고 시켰다 누구든 거수해서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는 무사히 집에 돌아갈 거라고
실눈뜬 거 다 보인다고
우리는 질끈 감았지만
그래도 다 보인다
전자레인지 내부를 환하게 밝히는 빛처럼
이 교실 안에도 환하게 빛나는
불온하게 꿈틀대는
암묵적인 것들
창문 밖으로
작게 쪼개진 선배들이
반짝이며 흩날리고
_「우리 모두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귀를 뚫었다」 부분
시집의 문을 여는 「우리 모두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귀를 뚫었다」는 1부 ‘살던 집에 불을 붙이는 건 어떤 마음일까’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암시한다. “금붕어”를 “액체질소”에 담그는 “친구들”, “사랑과 우정”을 “불온”한 방식으로 배우게 하는 “선생”이 있는 교실 풍경은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주요한 시기인 십대 시절이 크고 작은 폭력성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폭력성의 세계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끝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것을” “바지에서 꺼내 보여주”(「방학」)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길가’, “화가 나면 사포질을” 하는 “아버지”가 있는 ‘집’ 또한 마찬가지로 화자에게 놓인 난관의 공간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화자가 “배운 걸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주입식 선과 악을 잘 흡수하는”(「낭만을 먹고 자란 돼지는」) 순응적인 사람으로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자는 누구도 피해 입히지 않고 차라리 자신의 “테두리”(「지진 파티」)를 지움으로써 자신을 억압하는 “미숙했던 시절”(「다정과 과정」)로부터, “발전과 발명과 발견의 강박”(「낭만을 먹고 자란 돼지는」)으로부터 탈주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집을”(「방학」) 거듭 허물며 자기 갱신을 단행한다.
그 시절 썼던 시는 휴지통에 넣고
나는 새로 적는다
_「다정과 과정」 부분
화자의 이러한 태도는 2부 ‘주인공은 세계를 꼭 구해야 하는 걸까’로 연결, 확장되는 듯하다. 2부의 화자는 “빵집”과 “패스트푸드점”(「그땐 프렌치블랙을 피웠다 같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프렌치블랙 난민들이라 불렀다」), “피자집”(「피자 커터」)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살다보면 싸울지 말지를,/ 말할지 말지를 고민”(「수건이 쌓여 무덤을 만들었어」)하며 성장한 “어른”(「장르가 다른 핑크」)이다. 가게 밖에서는 여느 동료 시민일 따름인 손님들은 화자에게 가혹하게 굴고, 그런 취약한 노동 현장에서 화자는 고통받는다.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은
이제 내 장면은 내가 책임지라는 거겠지
창고에 살던 무언가는
학교가 폐교된 뒤로 봉인되어 있다
오래전
줄을 넘던 그 운동장에서
우리는 모래구름을 만들며 정의를 약속했다
정의는 다음 사람에게
창고를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거야
이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우리는 기를 모았다
세계의 작은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_「존재의 성립」 부분
그러나 화자는 누군가를, 혹은 세계를 비난하기보다 그런 세계의 폭력성에 잠깐이나마 물들어 있던 자신을 먼저 성찰하는 윤리적인 태도를 보이며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는 이번 시집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존재의 성립」에서 또 한번 아름답게 빛난다. 화자는 “오래전” “누구가” “매질하는 소리”가 들려오곤 하던 “학교”의 “체육관 창고”를 떠올리면서, “정의”란 “다음 사람에게/ 창고를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거”라고 말한다. 그 정의란 한 명의 주인공이 “세계를 구해야 하는”(「장르가 다른 핑크」) 영웅 중심적 세상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부”로 둔 “네 살 많은 언니”가 화자에게 일러준 것처럼, “내 장면은 내가 책임지”(「존재의 성립」)는 것임을 깨닫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와 나는 오 년째 같이 살고 있다
평생을 약속한
믿음 하나로
현재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나는 통조림 공장에 간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뚜껑을 잠그다 돌아온다
(…)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다
이제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술에 취한 미래가
담벼락에 오줌을 누는 것을 본다
(…)
미래는 우리집에
꽁초를 버리는 언니의 이름
나는 미래의 벗은 몸을 생각하다가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안으로
손을 넣을 뻔한 적이 있다
_「오랜 미래」 부분
3부 ‘우리는 기울어진 시소에서 내려올 수 없겠다’에는 사랑과 관계에 대한 시편들이 담겨 있다. 이예진 시 속 ‘사랑’하고 있는 이들은 각자 마음의 “무게”가 달라서 “기울어진 시소”(「영화부」)처럼 관계가 어긋나 있는 듯하다. “오 년째 같이 살고 있”는 현재와 ‘나’의 이야기를 그린 「오랜 미래」에서 이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현재,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나’는 현재가 가르치는 한 아이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데, 현재는 그 아이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심상치 않은 아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열을 맞춰 서 있는 통조림”을 떠올릴 뿐이다.
이처럼 “금간 얼음 위에 서 있는 연인”(「스노볼」) 사이의 몰이해, 균열은 화자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는 무엇일까”(「러브 앤 에너지」)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애인”을 “이해”하기 위해, 한때 “‘사랑’이 포함된 제목의 시집을 찾아”(「사랑이 누리고 간 자리」)다니기도 했던 화자는, 이제 “지루”하고 “익숙”(「러브 앤 에너지」)하고 낡게 느껴지는 사랑에 얽매이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는/ 무엇을 끌어오는 힘이 있나요?”(「러브 앤 에너지」)라고 생각의 회로를 바꾸며 관계 속에서 한 발짝 떨어져나와 자신과 타인이 누리고 간 ‘사랑의 자리’에 대해서 묘사하는 성숙한 시선을 획득한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장을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사람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
여기선 문을 잠그지 않아도 괜찮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_「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부분
4부 ‘칼을 숨긴 사람들은 왜 울면서 웃고 있었는지’는 주로 유년 시절 가족에게 받은 상처의 모습을 그리면서 독자로 하여금 아릿한 회상에 잠기게 하는 한편, 이예진 시의 내밀한 근원적 세계를 살피게 한다. “호랑이띠라서 성질 죽여야 했”(「나는 호랑이띠라서」)던, “닭 잡는 소리”가 들려오는 명절의 한가운데에서 “너 예쁜 딸은 못 낳겠구나”(「구정」)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화자의 이야기는 가족 내에서 화자와 같은 세대의 여성이 겪은 차별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예진의 시는 상처를 회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따로 살게 된 엄마와 아빠, 그리고 떠나간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시인의 데뷔작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의 마지막 문장이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안전하게 기거하는 이미지로 표상되는 ‘집’이 사라지자 ‘방향’이라는 목적이 생겼다는 데에서 이미 ‘테두리가 없는 퍼즐 조각’으로서의 존재 방식을 예견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인은 문학동네시인선 200번 기념 티저 시집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에서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감정이 감정으로만 문장이 문장으로만 남지 않는, 그런 곳에 마을을 짓고 견디는 것”이라 답한 바 있다. 시인은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을 통해 자신처럼 ‘테두리가 없는 퍼즐 조각’ 같은 무수한 이들에게 ‘마을’이 되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장르가 다른 핑크』는 한 시절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언제나 ‘장르가 다른 핑크’가 되기를 꿈꾸는, 쨍한 밝음 속에 깃든 간절함의 색채 그 자체이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당신이 읽고 나서
이로운 세상이란 무엇인지
결말을 작성해주기 바란다
먼 옛날 어딘가에서 힘을 모으던 소저의 후손이
당신일지도 모른다
_「이 소저는 큰 힘이 여기서 나온다고 믿었다」 부분
『장르가 다른 핑크』의 자문화기술지는, 진공상태 속 오롯한 이미지로 상상된 자기(self)가 아닌, 무수한 타자들의 흔적이자 동시에 거기에서 비롯된 특이성으로서의 ‘나’들의 기록이다. 또한 이 시들은 무한한 다시 쓰기를 가능케 하는 그 구멍들을 찾고 응시하는 일에 우리를 연루시킨다. (…) 이예진의 『장르가 다른 핑크』는 다시 쓰일 시들의 진원지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시인의 첫 시집에 대한 말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삶을 점점 더 회로화하는 세계 속에서 시라는 장르에 거는 믿음의 말이기도 하다. _김미정,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