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서포 김만중!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서포 김만중金萬重(1637∼1692)은 조선 시대 예학의 대가인 사계沙溪 김장생의 증손이고, 충렬공 김익겸의 아들이며, 숙종 대왕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그의 어머니 해평 윤 씨는 인조의 장인인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윤방의 증손녀이며, 이조참판 윤지의 따님이다.
이렇듯 김만중은 실로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서포 자신도 열여섯 살에 진사시에 급제한 후 도승지, 대제학, 대사헌을 거쳐 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니 그의 학식과 명예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소설을 창작할 수 있었을까? 당시는 오늘날과 달리 사대부가 소설을 창작하는 일이 대단히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으며, 소설 자체가 천대받던 시기였다. 그 모든 비판을 감수하고 소설을 창작한 데에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에 대한 서포의 지극한 효심과 파란만장했던 자기 삶의 굴곡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서포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누구보다 각별하였고, 비록 대단한 가문과 화려한 경력을 지녔지만 조정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해야만 했다. 《구운몽》을 집필할 당시에도 서포는 평북 선천의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서포는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위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달래기 위해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작품을 집필한 것이다.
선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난 서포는 다시 두어 달도 되지 않은 1689년에 다시 남해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이때 숙종이 희빈 장 씨에게 미혹되어 인현왕후를 내쫓은 사실을 모티브로 한 《사씨남정기》를 집필하였다.
《구운몽》
《구운몽九雲夢》의 구九는 성진과 팔선녀를 가리키고, 운雲은 인간의 삶을 나타났다 사라지는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즉 《구운몽》은 아홉 구름의 꿈, 아홉 사람이 꾼 꿈이라는 의미이며, 우리나라 고전 소설 가운데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이는 주제나 사상의 다양함은 물론이고 조선 시대에 쓰인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묘사가 탁월하기 때문이며, 뛰어난 상상력으로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자신이 전하고 싶은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김만중은 양소유라는 인물을 통해, 부귀영화를 누리며 절세미인들을 부인으로 두고 싶은 양반들의 욕망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구운몽》은 조선 시대 전형적인 양반 사회의 이상을 반영한 양반 소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또한 소설적인 재미도 뛰어나다. 팔선녀가 환생한 여덟 여인들은 각각의 뚜렷한 개성과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양소유가 이들과 만났다 이별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해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남녀 간의 사랑을 품위 있는 문체로 묘사한 것도 여느 작품과는 다른 점이다.
팔선녀를 만난 성진이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결국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열심히 불도를 닦아 극락세계로 간다는 내용을 통해,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야지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서포 자신의 생각을 담고 있다.
《구운몽》은 다채로운 구조와 사실적인 경향으로 조선 후기 소설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씨남정기》
《사씨남정기》는 ‘사 씨가 남쪽으로 쫓겨나게 된 사연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이 작품의 표면적인 내용은 처첩 간의 갈등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임금인 숙종이 희빈 장 씨에게 미혹되어 인현왕후를 내쫓고 희빈 장 씨를 왕비로 맞아들인 것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작품이다. 김만중은 이를 반대하다 유배를 가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이 소설을 썼다. 그가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뒤, 마침내 희빈 장 씨는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고 인현왕후는 다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김만중이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간교한 희빈 장 씨에게 눈이 멀어서 어진 인현왕후를 내쫓은 숙종의 잘못에 대한 비판이다. 더불어 축첩 제도가 빚은 한 가정의 비극을 통해 사회 제도의 모순과 양반 사대부의 부도덕함도 고발하고 있다.
국가나 사회에서 첩을 두는 것을 허용하는 축첩 제도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되어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이어져 온 나쁜 풍습이었다. 조선 시대에 왕은 여러 명의 후궁을 거느렸고 양반이나 돈 많은 지주들은 가난한 집안의 딸이나 집안에서 거느리던 노비, 또는 기생을 첩으로 들였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이 여러 명의 첩을 거느려도 항의할 수 없었으며, 남편을 잃어도 재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더욱 큰 문제가 된 것은 축첩 제도에 의해 태어난 서얼을 차별하던 제도였다. 《사씨남정기》는 이러한 축첩 제도의 불합리함과 양반 사대부의 부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현실을 비판하는 역할까지도 했다.
서포 김만중은 우리글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당시 양반들이 천대하던 한글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었다. 우리 문학은 마땅히 한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 서포는 ‘자기 나라 말을 버려두고 남의 말로 시문을 짓는다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며,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말의 다양한 표현미를 살려 인물의 심리와 장면 등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서포 김만중은 오로지 한문만을 떠받들던 당시 양반 사대부들과는 달리 한글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소설을 써서도, 읽어서도 안 되는 가치 없는 글이라며 멀리했고, 퇴계 이황마저도 ‘음란하여 족히 이야기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지만 서포는 소설을 천시하던 조선 시대에 소설의 가치를 높이 사서, 오늘날까지 빛나는 문학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이로써 양반 계층이 향유하던 문학이 평민들에게까지 널리 퍼지면서 한글 소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는 양반 문학에서 평민 문학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해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모국어에 기초하여 문학을 발전시켜야만 순정한 문학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 김만중의 선견지명은 우리 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되돌아보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