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적함을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환치시키는
윤후명 언어 미학의 진경
“나는 지금, 아무도 모르게 숨겨둔 나의 다른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끝없는 사유의 여정과 시적이고 투명한 언어를 바탕에 둔 글쓰기로 삶의 근원에 대한 물음과 성찰의 자세를 견지해온 중견 작가 윤후명이 새 소설집 『새의 말을 듣다』(문학과지성사, 2007)를 발표했다. 이태 전 나란히 선보인 장편과 개정판 『둔황의 사랑』(2005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의 책 100’ 선정)을 빼면 『가장 멀리 있는 나』(2001) 이후 6년 만에 묶어낸 첫 소설집으로, 1967년 시를 써서 데뷔한 작가의 40년 문단 경력에 의미 있는 방점으로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이번 작품집의 표지는 작가가 직접 그린 유화가 장식하고 있어 책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그림 「새의 말을 듣다」(2007)는 작가가 독도행 뱃길에 올랐을 때를 떠올려 형상화한 것으로, 독도의 동도와 서도 그리고 섬과 바다 위를 떠도는 흰 갈매기를 담고 있다.
삶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쓸쓸한 고해苦海의 여정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윤후명 문학은 끝없는 자아 찾기 여행을 오래도록 고집해왔고 그것은 곧 윤후명 작품 세계의 핵심으로 불려왔다. 총 10편이 실린 이번 작품집에서도 그의 고유한 글쓰기는 변함이 없다.
작가 자신으로 보아도 무방한 주인공들은 독도행 배를 타고 가거나(「새의 말을 듣다」), 무작정 헝가리 부다페스트행 열차에 몸을 싣기도 하고(「서울, 촛불 랩소디」), 청량리발 춘천행 열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기도 한다(「나비의 소녀」). 때로는 친구와 함께 강원도 탄광촌 주변과 충북 땅 어딘가를 헤매기도 하고(「의자에 관한 사랑 철학」), 미니버스를 타고 티베트의 가파른 낭떠러지를 오르거나(「구름의 향기」), 서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백령도를 찾아 가기도 한다(「초원의 향기」). 또한 후배 차를 얻어 타고 강원도 영월의 ‘김삿갓 축제’를 보려고 떠나거나(「고원으로 가다」), 포장마차 주인과 두 여자와 함께 강화도에 소풍을 가기도 하고(「태평양의 끝」), 인생을 정리해야 한다는 착잡한 심정으로 제주도 여행길에 오르기도 한다(「돌담길」). 오래전 협궤열차를 타고 시작된 윤후명의 여정은 둔황의 석굴,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길목 여기저기, 북방 우랄-알타이 사막,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대초원과 평원, 티베트의 고원, 얼룩진 현대사가 그대로 상흔이 된 채 떠 있는 남방의 섬들을 거쳐 다시 우리 땅 독도, 서해 최북단 백령도와 남쪽의 제주도에까지 이르고 있다.
여행의 때와 장소, 이유와 목적은 모두 다르지만, 주인공은 한결같이 집을 떠난 낯선 곳에서 자신의 현실과 과거를 돌아보게 되고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무시한 파편화된 기억들에 붙들리거나 때로는 어지러운 기시감을 체험한다. 그러는 중에 화자-작가는 삶의 중심을 잃고 허둥지둥 살아가기에만 급급했던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온전한 자아를 되찾고 싶어 하는 화자-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질긴 인연의 끈, 우연과 필연으로 엮인 삶의 본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삶은 축제가 아니라 고해(苦海)일지도 모른다”는 비극적 인식, 진정한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 놓여” 있을 거라는 안타까운 짐작 모두 문단 데뷔 40년, 인생 60년의 원숙한 삶을 살아온 작가 윤후명이기에 가능하고 또 그 설득력을 얻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아득한 미망 속에 더욱 뚜렷해지는 일상의 풍경
윤후명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모두 1인칭 ‘나’다. 데카르트가 천명한 근대정신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작가 윤후명이 추구하는 ‘진정한 자아의 회복’이란 삶의 진리와 우주 만물의 이치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고 그 때문에 작가가 선택한 ‘길을 떠나는 주인공’은 필연적일 수 있다. 윤후명의 소설이 서글픈 추억 속을 걸어가듯 대부분 쓸쓸한 어조를 띠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한편 “명징한 주체 의식은 화자가 ‘나’여야만 가능하다”는 윤후명의 철학은 곧 그의 문학이 된다. 윤후명은 한 신문에 썼던 칼럼에서 ‘누구나 다 잃어버린 것이 있다. 그 잃어버린 모든 것을 나는 소설 속에서 찾고 또 묻는다. 때문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공간은 현실공간과 구별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윤후명이 우랄-알타이를 내세운 우리 민족의 원류를 좇는 여행의 글쓰기를 놓지 못하는 이유도 결국엔 그것이 내 삶의 뿌리를 찾는 가장 원초적인 실천이라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삶의 뿌리를 사랑하는 문학에의 열정은, 그저 단순하고 소박한 사실에 그쳤던 것들을 시원을 가리키는 한 가닥 빛으로, 허기와 목마름으로 폐허가 된 삶을 따스하게 감싸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환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