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한국인은 바쇼와 시키의 하이쿠를 읽어야 할까
일본을 대표하는 하이쿠 시인, 바쇼와 시키를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이쿠, 바쇼에서 시키까지』는 하이쿠의 성인으로 불리는 바쇼의 '침묵과 여백의 미학'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더하여, 처음으로 하이쿠라는 용어를 쓰며 하이쿠의 근대화를 이끌어간 시키의 '사생과 현실 인식'을 독특한 시각으로 읽어내고 있다. 말(言)은 넘쳐나고, 감정은 과잉인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겨우 열일곱 자밖에 안 되는 바쇼와 시키의 하이쿠는 ‘침묵’과 ‘관찰’을 통해 깊은 메아리를 선물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자연과 사람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안한다.
『하이쿠, 바쇼에서 시키까지』는 한 권의 책에 바쇼와 시키, 두 시인만의 하이쿠 135편을 번역하고 해설을 붙여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매우 드문 일, 아니, 처음일지도 모른다. 특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바쇼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국에 덜 알려진 시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다. 그는 우리를 근대적 자의식과 객관적 시선의 공존으로 이끌어갔으며, 동아시아 문학이 어떻게 근대로 이행했는지를 가르쳐준 인물이다.
이 책은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하이쿠를 그저 감상하는 차원이 아니다. 동아시아 미학의 뿌리를 살피는 일이다. 나아가 인문학이 품고 있는 따뜻한 깊이와 넓이에 닿는 일이다. 한국문학, 특히 시와 시조가 과거와 현재를 비추며 미래의 길을 찾아가는 데도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디지털 시대와의 높은 적합성으로 요즘 한국에서 좋은 기운으로 일고 있는 디카시(dica詩)와도 분명 건강한 동행자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천천히 읽게 한다'는 점이다. 작품마다 원문과 우리말 번역, 그리고 해설을 곁들여 한 편의 시를 오래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끈다. 시가 태어난 시대와 문화, 계절어의 의미, 작품에 담긴 역사와 일화를 이해하고 나면, 열일곱 자의 짧은 시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드물게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에 정통한 저자 오석륜 시인은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울림을 살리기 위해 일본 하이쿠의 5·7·5로 된 17자를 우리말로도 무리하게 17자로 풀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말이 지닌 운율과 여운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 모든 작품에 일본어 원문과 읽는 방법도 함께 수록해, 독자들이 원문을 직접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한, 작품마다 배경과 문화, 역사, 표현 기법을 친절하게 해설해, 하이쿠를 처음 접하는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과도한 해석을 지양하면서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맥락을 제공해, 읽는 즐거움과 사유의 깊이를 함께 전한다.
오늘부터는/증표를 없애자/삿갓의 이슬
(今日よりや書付け消さん笠の露)
바쇼는 오쿠노호소미치 여행의 동반자인 제자와 여행하며 삿갓에 문구를 새겼다. 그러다 제자가 병으로 이탈하게 되어 혼자만의 여행을 받아들이며 삿갓에 묻은 아침이슬로 그 증표를 지우겠다는 것이다. 범상치 않은 바쇼의 시적 능력이 읽힌다.
아귀가 입을/벌리고 있는데/싸라기눈 뛰어드네
(鮟鱇の口あけて居る霰かな)
시키는 커다란 알갱이의 싸라기눈이 뚝뚝 떨어져 어물전 가게 앞에 매달린 아귀의 커다란 입속으로 계속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그 순간을 포착했다. 그것을 하이쿠에 담아낸 능력은 놀랍다. 아귀의 커다란 입과 싸라기눈의 조합 또한 훌륭하다.
말이 넘치는 시대, 열일곱 자가 건네는 깊은 침묵과 관찰
하루에도 수천 개의 문장이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뉴스와 SNS, 영상과 메시지는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지만, 정작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은 많지 않다. 더 많이 말할수록 더 쉽게 잊히는 시대.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을 덜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이쿠, 바쇼에서 시키까지』는 그런 시대에 찾아온 한 권의 조용한 초대장이다. 단 세 줄, 열일곱 자로 이루어진 짧은 시, 그러나 그 안에는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 계절과 시간, 만남과 이별이 응축되어 있다. 하이쿠는 설명하지 않는다. 감정 과잉이 없다. 자연을 느끼고 깊이 바라보는 힘과 함께 상상력을 길러주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차분해지는 명상의 효과도 일어난다. 삶의 한순간이라도 소중하게 느끼게 하며, 하나의 풍경을 보여준다. 첫눈이 수선화 이파리에 내리는 순간, 늦가을 달빛 아래 흩뿌리는 비, 국화 향기 속 오래된 불상들, 그리고 여행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작은 생명까지. 하이쿠는 거창한 사건보다 순간의 감각을 붙잡는다. 그 짧은 순간이 오히려 긴 여운으로 남는다.
오랜 연못에/개구리 뛰어드는/물소리 ‘텀벙’
(古池や蛙飛こむ水の音)
전통적인 서정을 버리고 개구리가 “텀벙” 물에 뛰어든 극히 비근한 장면을 소재로 다룬 이는 바쇼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곱씹어 읽어 보면, “오랜 연못”과 “텀벙” 소리는 서로가 미묘한 균형을 취하고 있다. 시정(詩情)을 깊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정보를 얻지만 깊이 바라보는 법은 점점 잊어가고 있다. 『하이쿠, 바쇼에서 시키까지』는 잠시 걸음을 늦추고 계절의 변화와 바람의 결, 꽃 한 송이와 새 한 마리의 움직임을 다시 바라보라고 말한다. 짧아서 읽기 쉬운 시가 아니라, 짧기에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시. 그것이 하이쿠의 힘이다. 말이 넘치는 시대일수록 침묵은 더욱 깊은 언어가 된다. 그리고 열일곱 자는 때로 한 권의 철학서보다 오래 마음에 머문다. 『하이쿠, 바쇼에서 시키까지』는 그 고요한 언어를 통해, 잊고 지냈던 사유와 감각을 우리 곁으로 다시 불러오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