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제국주의로 치닫던 일본은 우생 사상을 받아들여 국민을 우열로 구분하여 약자를 사회에서 걸러 내는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당시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은 병으로 인한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인 고난까지 극심히 겪어야 했다. 당시 한센병자는 법에 의해 격리 수용되어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음은 물론 강제 불임 시술과 임신 중절 수술을 당했으며 가족으로부터 절연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이런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은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문학에 녹여 냈다. 호조 다미오가 바로 그 대표 작가다. 1926년부터 2000년까지 발표된 한센병 문학 작품들을 모아 2002년에 발간한 《한센병 문학 전집(ハンセン病文学全集)》(전 10권) 중에서도 호조 다미오의 작품은 단연 최고작으로 손꼽힌다.
호조를 문학 세계로 이끈 이는 다름 아닌 《설국(雪国)》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호조는 1934년 8월 가와바타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때 호조는 가와바타(川端)의 성을 가와바타(河端)로 잘못 쓰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할 일은 문학밖에 없고 문학에서 한 줄기 빛을 찾고 있으니 제발 답장을 부탁한다고 애원하는 내용을 담아 보냈다. 만일 당시 문학지 《문학계》의 편집자이자 유명 인사였던 가와바타가 호조 다미오를 주목하지 않았다면 그의 작품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마침 《설국》을 구상하고 있던 야스나리는 호조의 편지를 받고서 두 달여 후 답장을 보냈고, 이후 호조의 작품 활동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발표된 것이 호조의 대표작 <생명의 초야>다. 이 작품은 1936년 《문학계》 2월호에 게재되었으며 이후 제2회 문학계상을 수상했고 제3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호조 다미오’라는 필명도 이 작품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이 작품을 필두로 가와바타의 손을 거쳐 간행된 작품집이 호조 다미오의 생전인 1936년에 출판되었는데, 출판되자마자 1년 만에 2만 부가 팔리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이번 책에는 호조의 대표작 <생명의 초야> 외에도 데뷔작인 <마키 노인>과 유작 <소극>을 비롯해 <나병원 기록>, <나병 가족>, <눈보라의 첫울음>, <망향가>의 총 일곱 작품을 수록했다.
책의 첫 작품 〈나병원 기록(癩院記録)〉은 호조 다미오가 직접 체험한 한센병 요양소에 대한 내용을 담은 글로서 일종의 르포다. 한센병 요양소 입원 절차부터 병동 건물의 구성과 규모, 병실의 종류, 병원 내 경제생활, 한센병의 구체적 증상과 치료법 등이 소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요양소 내의 결혼 사정과 단종 수술의 실태도 엿볼 수 있다.
〈나병 가족(癩家族)〉은 아내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차례로 요양소에 들어오면서 빚어지는 부모 자식 사이의 갈등과 슬픔이 잘 묘사된 작품이다. 한센병의 발병 사실을 숨긴 채 결혼한 아버지 사시치 때문에 장남 사키치와 장녀 후유코, 종국에는 막내 사타로까지도 한센병에 걸려 요양소 신세를 지게 된다. 한센병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한 가족을 통해 인간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눈보라의 첫울음(吹雪の産声)〉는 병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품는 숭고한 인간 정신이 깊은 감동을 주는 수작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밤, 한센병 수용소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아기와 목숨을 맞바꾸듯 한 사람이 스러진다.
〈마키 노인(間木老人)〉은 호조 다미오의 문단 데뷔작이다. 일본 모더니즘 문학의 거두였던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가 격찬했으며, 가와바타 역시 호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훌륭한 작품이라며 아낌없이 칭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센병 요양소에 입소한 지 얼마 안 되는 청년 우쓰와 마키 노인의 정서적 교류를 다룬 작품이다.
〈생명의 초야(いのちの初夜)〉는 오다 다카오라는 한 남자가 한센병 요양소에 입소하여 맞이한 첫날의 경험을 담은 호조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으로 호조는 제2회 문학계상을 수상했으며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다. 당시 아쿠타가와상 선고위원이었던 가와바타는 “이러한 작품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이런 작품을 곧바로 선정하지 않는다면 편찬자로서 문학에 종사할 자격도 권위도 없다”라면서 문학으로서의 순수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문예평론가이자 작가인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역시 “이상하리만큼 단순한 이야기지만 생명 그 자체를 표현한 몇 안 되는 소설로, 작품에서 문학 그 자체의 모습을 보았다”라는 평을 《요미우리신문》에 기고하며 극찬했다.
〈망향가(望郷歌)〉는 호조 다미오가 죽기 직전인 1937년에 발표됐다. 스물다섯 살에 발병하여 요양소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 도리조와, 불행한 가족사를 겪고 고아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한센병에 걸려 요양소에 들어온 야마시타 후토시라는 사내아이의 교분을 담은 작품으로,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 독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작품이다.
〈소극(道化芝居)〉은 1938년 《중앙공론》 4월호에 실린 작품으로 1937년 12월에 사망한 호조 다미오의 유작이다. 전향한 사회주의자인 야마다가 한센병에 걸린 옛 제자이자 사회주의 사상의 동지인 쓰지 잇사쿠라는 청년과 재회하는 이야기로, 이 작품에는 복자(伏字)가 상당히 많다. 이 역시 당시 요양소와 내무성 경보국의 검열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