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다시편 여덟번째 권
문혜진 시집, 『무증상 환자』 출간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약을 사고 카페에 간다
아플 때 멀쩡해 보이는 사람,
멀쩡해 보여도 아픈 사람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하고 제26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문혜진 시인의 네번째 시집 『무증상 환자』가 난다시편 8번으로 출간된다. 『질 나쁜 연애』 『검은 표범 여인』 『혜성의 냄새』 이후 9년 만에 펴내는 그의 이번 시집에는 총 51편의 시와 「문혜진의 편지」가 실렸으며 대표작 「무증상 환자」(Asymptomatic Patient)가 최민지(Min Ji Choi)의 번역으로 영문 수록되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지난겨울”(「문혜진의 편지」), 시인은 빙판길에서 골절상을 입고 한동안 누워 뼈가 붙기를 기다렸다. 팬데믹 시기 홀로 병상을 견디던 엄마의 고통이 시간차를 두고 몸으로 번져오는 것을 느끼며 “직접 부서지고 앓아보지 않고서야 가장 가까운 타인의 고통조차 온전히 내 몸의 통증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뼈아프게 실감”했다. 시인 자코테의 겨울이 엄혹한 기다림을 떠올리게 하듯, 그에게도 이 ‘기다림’은 “겪었음을, 고통받았음을, ‘견디어냈음’을 의미”했다. “저항하거나 절망하는 대신 끈질기게 응시함으로써 색감이 더욱 풍부”해지고, 유일한 빛이 소리 없이 몸에 스며들기를 기다리며 시인은 야생 나리와 새소리를 따라 깊이, 더 깊이 숲으로 들어갔다. 광화문 빌딩 숲에서도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새 울음”은 유리벽을 향해 부딪쳤고, 여기 “이 시들을 낳았다”(「시인의 말」).
그는 철학자 아감벤의 사유를 경유하며 “혼란한 맹목의 시대”(「문혜진의 편지」) 속, 절벽 아래로 내달리는 북극의 “레밍 무리”를 떠올린다. “팬데믹의 공포와 계엄의 밤을 지나며 우리는 ‘멀쩡해 보여도 아픈 사람, 아파 보여도 멀쩡한 사람’”이라는 둘의 모호한 경계 위를 위태롭게 지나왔다. “불안과 무기력을 질병처럼” 여기며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며 “오해와 편견의 벽”을 두르기도, “타인의 소리 없는 비명과 내면의 무너지는 기척에는 무감해진 채”, 서늘한 침묵의 벽 뒤로 각자 숨어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시인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무증상 환자」) 곳,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곳에서 탄소 유발자, 무기농 식욕자, 도파민 중독자, 생계형 변종, 밤의 얼굴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다른 시대의 입김”(「밤은 말한다」)으로 그 안에 “날숨”을 섞을 때. 세계의 가장 먼 끝, 울티마 툴레 너머의 어둠이 “빛의 망막”(「울티마 툴레」)을 벗기기 시작하고, 무언가 시인을 두드린다. “똑똑, 로켓배송이 온다”(「무증상 환자」).
야생 나리와 독미나리, 호랑지빠귀 울음 속으로
새소리를 따라 깊이,
더 깊이 숲으로 들어갔다
광화문 빌딩 숲에서도
한강 위 지하철에서도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새소리
유리벽에 부딪친 새 울음이
이 시들을 낳았다
울음을 자르며 터져나오는
투명한 벽의 사리(舍利)
그리고 벽을 뚫고 사라지는
총성 없는 시간의 탄피들
_「시인의 말」 전문
통증이 올 때마다
너는 아마릴리스를 생각한다 했지
너의 앙상해진 굽은 뼈는
점점 대지의 구근을 향하고 있다
시인은 모란디를 생각하며 “목련꽃”(「문혜진의 편지」)을 떠올린다. 꽃이 필 때쯤, “우아하고 꼿꼿한 자태의 후광은 겨울을 지나온 침묵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 앉아 글을 쓰는 밤”(「대멸종 연대시의 밤」)이면 자궁이 저릿하게 아파온다. “아이들이 찢고 나온 흉터”, “물고기 뼈처럼 휘어져 있는 켈로이드 흉터”. 물 고인 곳으로 “고래자리 별”이 쏟아지고, 고래자리 별은 “죽은 별들의 먼지 구름”을 다 마시고 있다. “인가와 군대, 감옥과 빌딩들을 천천히 삼킨다 천 개의 눈을 켜고, 어둠의 경계가 없어질 때까지, 어둠을 덧씌우며 몸부림치는 저 거대한 고래를 보라! 세상을 다 집어삼키고도 허기져 작은 눈을 부라리는 폭식증 환자”.(「고래」, 『질 나쁜 연애』) “흡,”(「홉스골」) “바이칼 호수”에 눈동자를 씻고, “달의 골수”를 마시고, “달빛”을 토해낸다. 호수가 출렁이는 이 밤, “나는 꼬리뼈가 아프다”.
여름은 붉은 꽃대의 “아마릴리스가 갈기를 세울 시간”(「아마릴리스」). 우리 등에서 터지는 골수의 비명을 여름이 찌를 시간. “실핏줄”(「아카시아 잎살이 아른거리는 오후」)이 다 터진 친구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다. 아른거리며 투명한, 식물과도 같은 반짝임. 아기는 온몸이 빨개지도록 “울음”을 터뜨린다. 어둠을 벗기는 것은 “긴 동고비 울음소리”(「산목련」). 달빛이 조용히 우리의 숨결에 포개지는 순간, “이제 파도를 탈 시간이다”(「송정」). 여름은 “파도의 입을 더 더 벌리며”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세운다”. 시인은 “숨을 참”(「밤은 말한다」)고, “밀어젖”히고, “터뜨”리고, “부딪”치고, “말아올”리고, “뒤섞”이고, “참”고, “토해”내고, “게워”내고, “삼”키고, “삭”이고, “태”우고, “마침내 비운다”. 혼신을 다한 적막으로 숨구멍을 틔운다. “키르셰! 키르셰!”(「본」) 친구의 작은 아이가 하얀 발로 버찌를 밟으니 아스팔트에 “검붉은 과육”이 번진다. 시인은 기도한다. 그의 사랑도 기꺼이 다시 시작할 용기로 피어나기를, 이 막막한 고요 속에서 더 먼 곳을 품을 수 있는 깊고 그윽한 시선이 그에게 깃들기를.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고통 속에 혼자 있는 이들에게 이 시가 “창가에 내려앉은 목련의 빛깔이 되어 따뜻한 봄 인사를 건네주기를”(「문혜진의 편지」).
이 울음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해진 어둠의 솔기를 뜯어내는 저녁 비탈길에서, 절벽 돋아나는 잡초들 사이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어둠과 파도 사이 밤의 해안에서, 식지 않은 지층의 균열이 밀려올라와 가슴을 대륙처럼 들어올린다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파도의 쇳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이 터져나와 몸을 찢고 거대한 울음으로 솟구친다 가슴을 텅텅 울리는 산비둘기 울음소리, 영원히 무너진 채 돋아나는 텅 빈 울음의 건축물, 뼈마디 마디마다 젖은 깃털이 돋고 폐를 쥐어짜듯 부풀었다 사그라지는 저 낮은 울음소리, 나는 이 울음을 지나 끝내 가슴을 가르는 칼날을 향해
아직 바닥에 닿지 못한 조약돌 하나가 내 늑골 사이 영원히 가라앉고 있다
_「가슴과 칼날 — 루이스 부르주아에게」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