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무언가를 밀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향한 치열한 응원
박철 시세계의 새로운 원년, 열한번째 시집 『대지의 있는 힘』 출간
소설가 현기영의 우정 에세이 「작가는 마지막 시민입니다」 수록
올해로 시력 서른일곱해째를 맞은 시인 박철의 열한번째 시집 『대지의 있는 힘』이 문학동네시인선 220번으로 출간되었다. 박철은 척박한 사회현실을 시인의 삶의 토양이었던 ‘김포’라는 무대로 형상화한 『김포행 막차』(창비, 1990), 주류에서 밀려난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희망의 언어로 노래한 『영진 설비 돈 갖다 주기』(문학동네, 2001),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고민케 함으로써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황현산으로 하여금 “박철을 치열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치열함을 배반하는 꼴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불러일으킨 『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2009), 부조리한 세계와 생활의 비참 속에서도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는 시선이 돋보인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창비, 2018) 등을 펴내며 시단에 그 이름을 굳건히 각인해왔다. 그간 꾸준한 시쓰기로 열 권의 시집을 발표해온 시인은 『불을 지펴야겠다』로 천상병시문학상과 백석문학상을, 『없는 영원에도 끝은 있으니』로 노작문학상과 이육사시문학상을 각각 동시 수상하는 값진 쾌거를 이루었다.
『대지의 있는 힘』은 그러한 시인이 “모색과 실험”을 통해 “확실한 변화”를 도모한 시집으로, 원점에서 새롭게 “미래로 향하”려는 시인의 발돋움이자 그 “한 권의 결실”(편집자와의 미니 인터뷰에서)이라 할 수 있다. 시집의 문을 여는 「있는 힘」을 살펴보자.
대형 쇼핑센터에 어둠이 밀려오고
한 사람이 무언가를 밀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하여
한 줄에 스무 개, 열다섯 줄을
어둠을 등에 지고 밀고 있었다
가득한 물건 가득한 사람
가득한 지구를 위하여
빈 수레를 밀고 있었다
아침을 향하여
경건하고 진지하게 밀고 있었다
발등을 세우고 두 손을 움켜쥐고
몸통으로 비스듬히 일직선으로
밑을 바라보며 밀고 있었다
대지란 이런 것이다
발걸음이란 이런 것이다
민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떤 주장도 외침도 없이
그냥 그래야 하는 것으로
기어이 그래야 하는 것으로
어둠 속에서
모두가 돌아간 곳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빈 수레를 밀고 있었다
_「있는 힘」 전문
시인은 “한 줄에 스무 개, 열다섯 줄”의 “빈 수레”를 “어떤 주장도 외침도 없이” 밀고 있는 “한 사람”을 바라본다. “그냥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어이 그래야” 한다는 마음으로 제 할일을 해내는 그를 시인은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있는 힘’이란 무엇일까. “있는 힘을 다하여 산맥처럼 걸어가는 강”(「흐르는 강물처럼」), “부딪고 또 치달아 있는 힘을 다하여”(「주먹도끼」), “나 있는 힘을 다하여 먼길을 돌아왔노라”(「전환기」) 등 여러 편의 시에서 그 구절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건대 ‘있는 힘’이란 시인이 이번 시집을 통해 강조하는 중요한 삶의 태도로 보인다. 그것은 “모두가 돌아간” “어둠 속에서”도 “경건하고 진지하게”(「있는 힘」) 제 몫의 노동을 해내는 이의 최선, 시인이 강조하는 숭고한 태도일 것이다. 시인은 그처럼 이 땅에 발붙이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을 향해 치열한 응원을 보내고, 우리 사회가 그러한 이들로 이루어진 “대지”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는 일과 스치고 지나는 모든 이들과
빈번한 초록과 간헐적인 너의 전부
멀리 대지에, 대지를 향하여, 대지를 이루고
너는 너 하나로 가득 자유와 생명을 내어 던지며
대지의 있는 힘
산마루 이어 넘는 너의 노래
가끔 너는 너에게 큰 점수를 주어라
_「소년에서―간헐적인 너의 전부」 부분
1부 ‘대지에, 대지를 향하여, 대지를 이루고’가 삶이라는 대지를 일구는 이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응원을 들려주고 있다면, 2부 ‘고운 눈에게는 고운 눈의 삶을 돌려준다’는 우리네 소박한 일상 속에서 사랑을 길어올리는 눈빛을 그리고 있다.
이제 맑은 하늘을 보면
뭐라도 내주고 싶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노 젓듯 흔드는 버드나무 아래
오랜 친구와 모처럼 강둑에 앉았다
(…)
이 맑은 하늘 아래
강가에나 나앉은 처지가 또한 우습기도 하고
아직은 조금 더 사랑해야 할 텐데
하늘이 저리 푸르고 강물이 다정해도
내줄 것을 마땅히 찾지 못했다
이제는 강 건너만 보아도 아득한 나이
가보지 못할 천불산 얘기에 울화가 치밀지만
그래도 맑은 강물이 돌아보며 흘러갈 때는
분명 오늘은 운수 좋은 날
빈손이라도 꼭 쥐고 일어선다
오늘은 기분좋은 날
사랑 얘기도 듣고 많은 것을 보고
무언가를 받아들고
처음 가는 길인 양 마을 안으로 돌아선다
_「가을의 전설」 부분
박철을 가리켜 시인 박형준은 “우리 시대 사람살이와 가장 닮은 시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 칭한 바 있다. 「가을의 전설」은 그처럼 시인이 담백한 언어로 읽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시이다. “강 건너만 보아도 아득”해지는 “나이”가 된 시인은 “오랜 친구”에게 “사랑 얘기도 듣고” 또 “많은 것을 보”며 “무언가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사랑하는 동안 살아가는 동안”(「시」)에 주변과 이웃에게, 그리고 자연에 “뭐라도 내주고 싶”고, 아직도 세상을 “조금 더 사랑”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한 여전히 삶을 “처음 가는 길인 양” 대하는 시인의 열린 마음은, 관계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국한하지 않고 개체와 개체 간으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개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 속을 들어가본 듯 개의 마음을 헤아리는 동안
수시로 현관문 앞에 서서 딸을 기다리는 개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지녀온 오래고 깊은 어떤 아픔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쩌면 나의 이런 생각이 다 틀릴지도 모른다
개는 개이고 나는 나일 뿐
우리의 만남이나 인연도 한나절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하나 분명한 것은
개에게도 사려[道]와 우리로선 알 수 없는 말[氣]이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더 분명한 것은
그를 통해 지난날 감당하기 힘들었던
나의 어떤 외로움을 다시 떠올렸다는 것이다
_「어느 개체와 보낸 한나절」 부분
시인은 “개는 개이고 나는 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문득 고요한 관조 속에서 개 또한 시인 자신처럼 저만의 “사려[道]”와 “말[氣]”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는다. 개를 통해 시인은 제 안의 외로움을 떠올리고, “한나절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이 스쳐가는 관계를 운명적인 마주침으로 의미화해냄으로써 우리 주변부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금 둘러보게 한다.
한편, 3부 ‘지금이야말로 시를 쓸 때다’는 시쓰기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을 다룬 시들을 통해 박철 시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생각해보면 급기야 차라리 나는 태어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너그러운 마음까지 들기도 하는 것인데 왜냐면 내가 내보이는 모습은 아버지가 이미 옛 시절 다 보인 바고 내가 살아가며 떨치지 못하는 막막함은 어머니가 살아오며 넘치게 부딪친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를 쓰며 살아가는 일도 할머니가 아궁이에 잔솔가지 긁어모으며 부지깽이로 다 그려본 것이고 내 융통성 없는 미련함은 아버지가 늘 주워 삼키던 할아버지의 못된 모습입니다.
(…)
그러나, 그러나 아직 멀리 떠나보지 않은 탓인지 시를 놓지 못해 그런지 뭔가 하나만은, 한둘은 나만이 겪고 나만이 간직할 깊은 사연이 있을 법한데, 하, 꼭 어디 숨어 있을 텐데, 아닌가, 그런가, 아무튼 이번 생에 그것까지 알고 갈지는 까마아득히 오리무중이니 아뿔싸.
_「변해야 좋으나」 부분
3부의 말미에 실린 「변해야 좋으나」는 시작 노트로 쓰인 산문으로 읽히면서 그 자체 한 편의 장시로도 읽힌다. “시를 쓰며 살아가는 일”에 대한 허무와 회의가 도드라져 보이지만, “그러나”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는 기실 시쓰기에 대한 시인의 놓을 수 없는 열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시인은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나만이 간직할 깊은 사연”을 담고 있는 “시”가 어딘가 “숨어 있을” 거라 생각하는 동시에, 하지만 그조차 “오리무중”이라 말함으로써 시쓰기를 하나의 미래(未來)로 남겨둔다. 이 의지는 그간에 쌓아올린 시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든 새롭고도 무한한 시를 향해 나아가려는 시적 태도가 아닐까? “때로는 낙망하고 때로는 기타줄을 퉁기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시를 쓰고 싶다는 ‘시인의 말’ 속 능청 어린 포부를 떠올리게도 하는 대목이다.
작가는 와글거리는 질주의 소음 속에서 정적과 침묵, 고독의 공간을 완강하게 지켜냅니다. 운명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 공간에서 작가는 부박한 세태 속에 빠르게 잊혀가는 소중한 의미들, 아름다운 것들을 성찰하고 그것들을 망각에서 구해서 눈에 보이게 뚜렷하게 재현해내는 일을 해야 하겠지요. (…) 그래서 나의 친구 시인 박철은 이렇게 노래한 것 아닐까요?
지금이야말로 시를 쓸 때다
시를 써야 할 때는 지금이다
새떼 잠 깨어 화염 속으로 물들고 놀은 번지고
밤마다 멀리 쇳덩이 끄는 소리
곧 거친 세상이 올 거다
지금은 꽃씨를 삼켜야 할 때
눈뜨고 거리에 서야 할 때
그럼 피리라 너는
_「허풍쟁이들」 부분
시인과 사십여 년의 우정을 쌓아온 망년우(忘年友) 소설가 현기영은 ‘우정 에세이’에서 “지금이야말로 시를 쓸 때다”라며 시인의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다리」)를 북돋는다. 그 응원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