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함께 그림 속에서 웃던
우리는 그곳에 머물 수 없었지만”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이
밀도 높게 농축된 감각으로
소리 없이 무너지는 현재의 순간을 비추다
문학동네 시인선 241번으로 류성훈 시인의 세번째 시집 『산 위의 미술관』을 펴낸다.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첫번째 시집인 『보이저 1호에게』(파란, 2020)에서 우주라는 아득한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고독함을 시로 형상화하며 자꾸만 멀어지는 존재 사이에 작용하는 척력을 발견해냈으며, 두번째 시집인 『라디오미르』(파란, 2023)에서는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언어로 구현해내는 동시에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듯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풍경에 두고 조망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선보여왔다.
그로부터 이 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밀도 높게 응축된 정동과 감각으로 현재의 순간들을 담는다.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이 시집은 오롯이 현재의 감각들로 가득차 있다. 현재에 단단하게 발을 디딘 류성훈의 화자는 읊조리는 듯한 독백을 통해 우리가 외면하고 지나친 슬픔과 공허의 감각을 날렵하게 포착해낸다.
괜찮아 세상엔 슬픔 이상 슬픔을
갖다 묻는 일이 필요하니까
누군가를 보내고 돌아올 때마다
남은 삶의 머리 위에 새 돌을 올리곤
매번 마지막일 거라고 믿으며
내일은 좋겠지, 내년엔 좋겠지
다음 생엔 더 좋겠지만
아무도 내일을 갖고 있지 않아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정작 한 마디도 못했다
_「산 위의 미술관」 부분
류성훈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으면서도, 감정과 정서의 표현이라는 서정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바로 화자의 혼잣말을 통해서이다. 연극의 독백이나 방백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그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누군가의 속마음을 우연히 엿듣게 되었을 때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정동을 느낄 수 있다.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 인물들, 단정할 수 없는 감정들, 수습되지 않는 기억들이 반복해서 등장하지만, 그로 인해 이 시집은 오히려 더 날것의 현실에 가까워진다. 이 시집에서 말하는 날것의 현실은 삶의 회복이나 성장과 거리가 있다. 화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결과 앞에서 원인을 묻지 않는다. 대신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마치 몸안으로 공기를 들이마시듯, 더 깊은 곳까지 가닿는다. 표제시인「산 위의 미술관」은 “죽어가는 아들 옆에서/ 아비는 삽을 들고 서 있다”는 상실의 상황과 함께 시작된다. 류성훈은 이 상실의 장면을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고, 삶 속에서 상실과 그에 따르는 애도가 어떻게 자리하는지 전체를 조망한다. 이 시에서 애도는 극복의 단계가 아니라, 존재의 한 방식이다. 이처럼 류성훈은 애도의 종결과 현실 수용이 단순한 회복이나 성장의 서사가 아니라 비가역적인 상실을 끌어안는 행위임을 드러낸다.
이 시집의 시적 주체는 끊임없이 ‘지금’에 붙들려 있다. “아무도 내일을 갖고 있지 않아”(「산 위의 미술관」)라는 구절에서 느낄 수 있듯, 과거나 미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과거는 언제든 현재로 재점화될 수 있는 “사화산”(「한라봉아 성훈이 먹어라」) 같은 시간이며, 미래는 희망이라기보다 유예된 공허로 존재한다. 들꽃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그 아름다움 앞에서 멈춰 서고, 세월을 정의해보려 하지만 결국은 “검증하지 못했다”(「불온시」)는 고백을 남기는 태도는 이 시집이 지닌 솔직함의 또다른 표현 방식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시간은 단 하나, 현재뿐이다. 버티기 위해 더 소소해지고, 버려도 다시 되돌아오는 일상들과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끝내 엎질러진 상태로 남겨둔 상처가 중요하다. 류성훈의 시는 과거의 상처와 불투명한 미래가 우리를 만들었다거나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그렇게 현재만을 남겨둔 채 살아지는 삶도 충분히 진실할 수 있음을 조용히 증명해낸다.
나눠야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눌 이유가 없는 시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추워지는 그때
꽉 찬 냉장고에 먹을 게 없듯
너와도 이별하고 나와도 이별, 애초
만난 적도 없기로 하면
씻어도 씻어도
씻기는 몸뚱이
그래도 귀엽게는 늙고 싶어
포트는 있지만 커피가 없고
보일러는 있지만 가스가 없고
그릇은 있는데 김치가 없고
현재는 있지만 그 속에 우리가 없고
삶은 있지만 내가 없는 곳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_「아직」 부분
『산 위의 미술관』은 핵심이 비어 있는 정동의 지도이기도 하다.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세대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조금씩은 공허를 지니고 있다. “나눠야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눌 이유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보일러는 있지만 가스가 없고” “현재는 있지만 그 속에 우리가 없고” “삶은 있지만 내가 없는” 상황을 그저 버텨내고 있다. 주변은 있지만 중심이 없고, 장치는 있지만 동력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 공허 속에서 ‘나’와 ‘너’는 “귀엽게는 늙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갖고, “씻어도 씻어도/ 씻기는 몸뚱이”로 남아 있는 자기 자신을 조용히 응시한다. 류성훈의 이번 시집은 이처럼 외롭고 덤덤하며, 그래서 더 강렬하게 귀에 꽂히는 독백의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소진된 인간(조강석, 문학평론가)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이 단순한 체념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위로는 타인에게 건네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 덤덤한 위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어떤 다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한 독자는, ‘뒷모습’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시에서 앞모습보다 더 긴 여운을 주는 누군가의 등을 보게 된다. “우리는 결국 꺼져야 다시 만날 어느 이른 봄의 밤바람이 될 거면서”(「뒷모습」)라고 말하는 마지막 시구는, 비상도 추락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맴도는 존재의 감정을 정직하게 끌어안는다.
류성훈의 『산 위의 미술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무표정한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위로를 건네는 대신 함께 현재에 머무르는 문장들로, 지금 이곳의 무게를 끝내 외면하지 않는다. 시에서 발견되는 화자의 수많은 독백은 끝내 독백으로 남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흘러간 날들 중엔 흘려보낸 날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혹은 내버려두어도 당신의 뒷모습이 표정보다 더 오래 남는다 다 그리기도 전에 자리를 터는 피사체를 보면서, 시간과 질감을 한 획에 그리는 놀이만 손에 익히면서, 벌건 숯이 어느 날 더 하얗게 잠들기까지 품고만 있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을 모르면서, 우리는 결국 꺼져야 다시 만날 이른 봄의 밤바람이 될 거면서,
_「뒷모습」 전문
시집의 마지막에 놓인 시의 제목이 ‘뒷모습’이며 마지막 문장의 주어가 “우리”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엿듣자니, 공전하는 공동의 목소리는 마치 코러스처럼 “우리는 결국 꺼져야 다시 만날 이른 봄의 밤바람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뒷모습을 보이는 이 중 어떤 이는 이내 돌아올 것처럼 발걸음을 옮기지만 어떤 이는 기미와 여지를 남기고 떠나는 피로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소진된 인간’(질 들뢰즈)으로 떠난다. 이 시집은 소진된 인간의 뒷모습을 끝까지 정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
_조강석,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