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평>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을 전면으로 내세운 이 책은 역사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증명함과 동시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의 실상을 입체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 임용한 역사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장
더없이 하찮으면서도 존엄했던 조선 백성의 삶을 구석구석 조명하고 있다. 각기 다른 형색으로 역사를 수놓은 민초들의 인생과 사연을 읽다 보면 역사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 김인호 광운대학교 역사학부 교수
조선 왕조가 남긴 백성들의 은밀하고 위대한 이야기
■ 거꾸로 보면 더욱 생생해지는 조선의 실상
《조선왕조실록》은 2077책에 이를 만큼 방대할 뿐만 아니라 왕실 중심으로 서술된 까닭에 일반인이 읽기에 쉽지 않다. 그러나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뜻밖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날 수 있다. 그 흥미로움은 대개 주류가 아닌 아류, 정사가 아닌 야사(野史)에서 나온다. 목이 달아날지언정 직필을 굽히지 않던 기개 높은 사관들 덕분에 우리는 굵직한 인물과 사건에 가려진 백성들의 소소한 이야기뿐 아니라 왕조가 감추고 싶어 했을 남세스러운 사건사고도 엿볼 수 있다.
신간 《조선백성실록》은 조선 백성들과 관련된 사연을 중심으로 여성, 종교인, 외국인, 동물, 사건사고 등 그동안 교과서나 주류 역사서에서 볼 수 없었던 밑바닥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선시대를 거꾸로 봄으로써 그 실상에 더 다가가고자 왕과 함께 역사책에 이름을 올린 민초들의 이야기를 담아 조선의 맨얼굴을 입체감 있게 그려냈다. 또한 남성 중심 문화에 당당하게 저항한 여성들, 이런저런 이유로 조선에 들어와 뿌리 내리거나 자취 없이 사라진 외국인들, 백성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한 국가 정책과 양반들의 술수, 더없이 사랑받다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외래 동물 등 조선시대의 숨겨진 모습들도 보여준다.
■ 왕의 드라마에 잠시 잠깐 등장한 주인공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 문학작품 속 백성들은 대개 순박하고 순종적인 사람들로 묘사된다. 고단하고 답답한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유교사회의 온갖 제도와 억압을 한평생 감내하며 살다간 무명인일 뿐이다. 그러나 《조선백성실록》은 그들의 순박하면서도 비열하고, 순종적이면서도 반항적인, 그야말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82세 노인이 군기점고(지금의 예비군훈련)에 나오고, 북방 강제이주 정책 때문에 하루아침에 고향을 떠나며, 장성 쌓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주인 대신 옥살이를 하고 곤장을 맞는다. 이런 순종적인 이미지와는 반대로, 왕의 금지령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 던지기 놀이(돌싸움, 석전)’를 즐기고, 저화(종이돈)를 강권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가혹한 세금과 부역에 맞서 섬으로 도망하거나 깊은 산속에 해방구를 만들기도 한다.
영의정의 고리사채에 억울하게 재산을 잃거나 종말론과 사이비 교주를 맹신하는 모습을 보면 순박하고 어리석은 듯하지만, 죄를 면하기 위해 서로를 모함하고, 왕에게 거짓말을 하며, 도적이 되어 사람부터 먼저 죽이고 돈을 뺏는 것을 보면 잔인하고 비열하기 이를 데 없다.
한편 조선의 백성이기에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성군인 세종 때조차 기근 때문에 나무껍질과 흙으로 연명하고, 주인의 험담을 했다는 이유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렇듯 조선 백성의 다양한 삶의 장면들은 왕이 주인공인 역사책에 잠시 잠깐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후대에 전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좀 더 입체감 있게 볼 수 있게 되었다.
■ 황당하고 어이없는 조선판 돌발영상
《조선백성실록》은 백성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승려들이 앙갚음을 하고자 중학(中學)에 난입하여 유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인육 괴담으로 온 나라가 들썩인다. 왕이 직접 조사하는 참혹하고 억울한 사건들이 있는가 하면, 명나라에 바칠 매와 공녀와 관련된 안타까운 일도 벌어진다.
그 가운데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있다. 조선의 도읍을 정하기 위해 태조가 동전 던지기를 제안하고, 거짓 보고에 매번 속아 새 땅을 찾으러 사람을 보낸 세종, 일본으로부터 공물로 받은 코끼리를 귀양 보낸 사연 등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가부장문화의 주변인이었던 여성과 이방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히 흥미롭다. 한없이 순종적일 것 같은 조선의 여인 중에는 남편의 외도에 맞바람을 피우고 폭력을 휘두르고 이혼장을 내놓는 자도 있었다. 정절이 미덕인 시대에 왜구와 싸우다 전사한 남편을 위해 7년간 소복을 벗지 않은 열녀도 있지만, 결혼을 세 번 이상 하거나 음란한 행위를 해서 ‘자녀안’에 이름을 올린 여자도 있다. 일본과 중국을 비롯하여 몽골, 이슬람 나라, 유구국, 구변국 등 조선 땅에 들어와 독특한 사연으로 기록에 남은 자들도 있다.
《조선백성실록》은 족보처럼 지루하기만 한 조선의 역사를 우리 선조들이 살아 숨 쉰 현장으로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준다. 특히 백성에 대한 조선 위정자들의 태도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 지도자들이 국민을 대하는 태도와 닮은 듯 다르다. 하지만 정치사상과 경제수준, 인권의식 등 모든 것이 뒤떨어진 조선이지만 ‘민심은 천심’이라는 가치만은 오늘날 못지않게 소중히 여긴 시대였음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