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떻게 시험 치고, 어디로 놀러 다녔을까? 고려 때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을 성현(成俔)이 맛깔 나는 문장으로 기록했다. 왕세가ㆍ사대부ㆍ문인ㆍ서화가ㆍ음악가 등의 인물 일화를 비롯해 풍속ㆍ지리ㆍ제도ㆍ음악ㆍ문화ㆍ소화(笑話) 등 사회 문화 전반을 336편의 이야기로 전한다.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중기에 성현(成俔)이 지은 잡기류(雜記類) 문헌이다. 고려 때부터 조선 성종 때까지 왕세가ㆍ사대부ㆍ문인ㆍ서화가ㆍ음악가 등의 인물 일화를 비롯해 풍속ㆍ지리ㆍ제도ㆍ음악ㆍ문화ㆍ소화(笑話) 등 사회 문화 전반을 다루고 있다. 책의 저술 연도가 분명하지 않으나, 1499년(연산 5)까지의 일이 기록되었고, 성현이 1504년에 죽었음을 감안하면, 1499∼1504년 사이에 저술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성종과 당대 관료층 문인들의 잡기류에 대한 관심은 성현이 ≪용재총화≫를 저술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성임(成任), 성간(成侃) 두 형의 영향이 크다. 성임과 성간은 경전(經典)만 추종하는 도학자(道學者)와는 다른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다. 성임은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 ≪태평통재(太平通載)≫를 엮었다. 같은 시기에 서거정(徐居正)은 ≪필원잡기(筆苑雜記)≫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강희맹(姜希孟)은 ≪촌담해이(村談解弛)≫, 이육(李陸)은 ≪청파극담(靑坡劇談)≫을 저술했다. 이육은 성현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돈이다. 이 같은 여건 속에서 성현이 ≪용재총화≫를 저술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용재총화≫는 책 이름에서 시사하듯이 여러 유형의 이야기를 집록(集錄)한 그야말로 ‘총화(叢話)’다. 서거정의 ≪필원잡기≫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 세 유형의 이야기를 모두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용재총화≫는 서거정의 저술처럼 이야기를 유형별로 구분하고 있지 않다. 이육의 ≪청파극담≫처럼 내용을 분류해서 수록한 것도 아니다. ≪용재총화≫는 책의 권수만 구별되어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기준이 있어 구별된 것도 아니다. 단지 비슷한 이야기가 군집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336편이나 되는 이야기가 권수만 구분된 채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내용을 분석해 정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용재총화≫에 소재한 이야기는 기실(記實)ㆍ골계(滑稽)ㆍ기이(紀異)ㆍ잡론(雜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기실이다. 잡론의 개인 기록까지 합치면 거의 전부가 필기류에 속한다. 성현은 ≪패설(稗說)≫ 6권을 저술했다. ≪용재총화≫ 외에 별도로 ≪패설≫을 저술했다는 사실은 성현이 필기와 패설을 구별해서 정리했음을 시사한다.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의 사회상 전반을 관심 있게 다룬 잡기류 문헌이다. 성현은 파한의 자료지만 국승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국사에 기록되지 못한 이야기를 관심 있게 기록했다. 이 책에 담긴 다양한 기록은 오늘날 사회학ㆍ민속학ㆍ구비 문학은 물론 한국학 연구의 사료로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책속으로 추가>
●9. 5 성균관 유생의 놀이
해마다 여름과 겨울에 성균관 유생들은 종이에 ‘궐(闕)’ 자를 써서 공자(孔子)를 왕으로 존경해 받들어 모신다. 동학(東學)을 복성공(復聖公)의 나라로 삼고, 남학(南學)을 술성공(述聖公)의 나라로 삼으며, 중학(中學)을 종성공(宗聖公)의 나라로 삼고, 서학(西學)을 아성공(亞聖公)의 나라로 삼아 제후가 천자를 우러러보는 것처럼 한다.
관내의 상사(上舍)ㆍ하사(下舍)의 사람들을 백관의 직책에 추천하되 이조가 인물을 전형해 선발하는 일을 맡는다. 사람의 현부를 변별해 후보를 추천하는 것을 모두 알맞게 한다.
승지에 임명된 사람은 은대연(銀臺宴)을 베풀며, 사람의 성(姓)에 공(孔) 자와 구(丘) 자에 관계가 있는 자는 모두 종정(宗正)의 벼슬을 준다. 만약 불손한 자가 있으면 가느다란 실띠로 항쇄(項鎖)를 씌워 가지고 와서 방의 판자 밑에 가두어 놓고 의금부 제조에게 명해 죄를 묻게 한다. 매우 죄가 많아서 횡역(橫逆)의 죄에 해당하는 자는 풀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서 참형에 처한다.
도읍을 옮기게 되면 ‘궐(闕)’ 자를 처음에는 동재(東齋)에 붙였다가 명륜당(明倫堂)에 올려 특사(特赦)를 내린 뒤에 서재(西齋)에 붙인다.
재추가 된 자는 종이로 띠를 만들어 맥초(麥草)를 붙여 금빛이 나게 하고, 백지를 잘라 망건에 붙여서 옥관자(玉貫子)라 부른다. 장수가 된 자는 종이를 잘라 깃[羽]을 만들어 갓 위에 꽂아 융복(戎服)의 모양을 만든다. 사학(四學)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는데 닭으로 송골매[海東靑]를 삼아 바친다. 예조에서는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되, 술 한 잔을 주며 안주로는 볶은 콩을 사용한다. 재(齋)에 수직(守直)하는 아이에게 명해 솥뚜껑을 치고 노래를 하면서 대접한다. 이를 ‘동악(動樂)’이라 한다.
관(館)에서도 또한 사신을 사학(四學)에 보내는데 이를 천사(天使)라고 한다. 그 학(學)에서는 베옷과 이불로 집 기둥을 싸서 이를 결채(結綵)라 하고 사신을 맞이한다. 옛날에 상사(上舍) 윤심(尹深)이 천사가 되어 겉에는 속이 붉은 옷을 입고, 대를 타고 저자 복판을 지나니 사람들이 다투어 웃었다. 윤심은 손을 휘두르며 중국 말 하는 시늉을 하면서 옆에 아무도 없는 양 제멋대로 떠들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석전제(釋奠祭) 하루 전에는 이름을 뽑아 삼공을 삼고, 그 나머지 상사는 모두 별명으로 백(伯)을 봉하며, 하재(下齋)의 유생들도 모든 벼슬을 임명하되, 차등이 있게 한다. 사학의 유생으로서 와서 제사를 돕는 자들에게는 해학으로 문제를 내어 제술하게 한다. 그 성적의 등급을 매겨 천장급제(天場及第)라고 하고, 뜰에서 방(榜)을 부른다. 크게 정초(政草)를 써서 대성전(大成殿)앞에 반포하면 헌관과 선배들이 모두 모여서 본다. 조정에서 하는 일과 다름이 없다.
태종 때 어떤 내환(內宦)이 천도(遷都)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 상주하기를, “성균관 유생이 모반합니다”라고 아뢰었다. 태종이 자세히 그 사유를 자세히 듣고 전교하기를, “이는 유생들의 고례(古例)다.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