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두 발에 집중해
바닥을 느껴
그다음
바닥을 밀어내”
얄팍한 세계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태어난
신이인(新異人)이라는 새로운 이종 인간
나는 툭하면 이상한 애가 됐다. 초등학생 땐 이름보다 외계인이라는 별명으로 자주 불렸다. 중학교 담임 교사는 나 같은 애랑 잘 지내주는 반 애들에게 선생으로서 고맙다는 말을 했었고. 고등학교에 올라가 자기소개를 하는데 누군가 이상해! 소리쳤다. 누구는 나한테 특이한 척하지 말라고 하고 누구는 내가 특이해서 좋다고 하고 누구는 남들처럼 지낼 수 없겠냐고 한숨을 쉬었다. 영문을 몰랐다.
_2021 한국일보 신춘문예 ‘수상소감’에서
202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신이인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 외계인이 될지도 몰라』를 문학동네시인선 235번으로 펴낸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들을 껴안으며 써나가주실 것이라 믿는다”는 단단한 지지 속에 문단에 나온 젊은 시인은 이듬해 “차분하고 담백한 난동”(조대한 평론가)이라는 평을 받으며 자음과모음 ‘2022 여름의 시’에 작품을 올리고, “아름답고 불온하고 이상한 ‘성장-시’”(김행숙 시인), “솔직하고 발칙하게 세상을 날것 그대로 노래하는 시선”(강동호 평론가)이라는 명명과 함께 2022·2024 문지문학상 후보에 연이어 이름을 올리며 고유하고도 믿음직한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음을 증명해냈다. 첫 시집 『검은 머리 짐승 사전』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다중 우주를 천연덕스럽게 깡총거리며 넘나”(문학평론가 전승민, 해설)들었던 그는 2년 만에 새로 펴내는 이번 시집을 무대로 개개의 인간 종(種)이 속해 있는 독립된 우주를 펼쳐 보인다.
시집은 총 52편의 시를 아홉 개의 부로 촘촘하게 나누어 엮는다. 각 부의 제목에는 수록된 시를 대표하는 한 글자 단어가 붙었다. ‘길’ ‘옷’ ‘집’ ‘춤’ ‘칼’ ‘별’ ‘피’ ‘밤’ ‘꿈’에 이르기까지 마치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처음 배울 법한 쉬운 단어들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더불어 “툭하면 이상한 애가 됐다”는 시인의 신춘문예 수상소감을 떠올리게 되는 이 시집의 표제는 그가 시인으로서 발화하기 원했던 목소리의 본령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음을 짐작게 한다. 지구에 사는 ‘이상한 애’가 아닌 빛나는 행성을 유랑하는 ‘외계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시인. 그의 이름 석 자를 빌려 ‘신이인(新異人)’, 즉 새로운 이종 인간이라 불러보면 어떨까.
한때 우리였다는 말은 얼마나 낡은 표현이니
우리라는 말 또한
우리에게 얼마나 낡았니
별것이 다 부끄러워 혼자 잔다
예를 들면 이불이 촌스러운 거
한때 우리에게 참 새 이불이었는데
나 아직 새사람이 되지 못했고
가끔은 헌 시를 써
옛날에 유행했을 것 같은
시를 처음 쓰는 사람이 쓸 것 같은
시를 겁도 없이 써
옛날이 그리워서
그립다는 말도 막 쓴다
그리고
행복해
불행히도
_「꿈의 대화」 부분
“우리라는 말 또한/ 우리에게 얼마나 낡았니” 하는 중얼거림은 ‘우리’라는 말의 허망함을 꼬집는다. “아직 새사람이 되지 못”한 나는 때때로 옛날을 그리워하며 역설적인 행복에 잠기지만 그 또한 과거를 지나왔기에 가능한 화해의 순간이다. 이는 “행복은 옛날 거기/ 아무것도 안 보이던 자리에 있었”다고 회상하면서도 “나를 찾지 않으며/ 옛날을 기억해주길” 당부하는 시인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열심히 살다가 흉해”(시인의 말)진 모습은 “투명 취급/ 아니면 특별한 취급을 받”(「거짓말」)게 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가 실은 개별적인 인간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시인이 세상과 불화하며 나로서 존재해왔다는 증거일 테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함께할 수 없”(「젊은 날─우주정류장」)는 세계의 발화자는 ‘나’로 수렴한다. 신이인이 창조한 “직사각형 숲”(「꿈동산」), 시집의 물성을 띤 그곳에 늘 비인간 존재가 널뛴다는 점을 떠올릴 때 ‘나’의 주체가 인간 화자뿐 아니라 동물과 사물, 글자로까지 나아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인을 대신해 등장하는 시적 화자 ‘나’의 주체가 한 편의 시 안에서 별안간 “낡고 고장난 기계”(「꿈의 기계」), “꽃집에서 사귄 시클라멘 화분”(「값」), “손쉬운 실타래”(「실타래들」), “진실한 상자”(「상자들」)로 변한다는 점이다. 마치 빙의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시적 장치는 인간이 뒤집어쓴 얄팍한 허물이 이 시집을 통해 탈락되어갈 것임을 암시한다.
「뱀」에 따르면 “허물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며 허물의 주인들은 그 두 가지 모두를 감내한다”. 주지하다시피 첫번째는 ‘살갗을 덮은 껍질’, 두번째는 ‘잘못 저지른 실수’를 뜻한다. 살갗을 덮은 껍질이 곧 실수라는 인식은 태초부터 원죄를 품고 태어난 인간 존재에 대한 자각으로 읽힌다. 2부의 제목이기도 한 ‘옷’은 이러한 몸을 보호하는 동시에 감추는 역할을 수행한다. 허물을 벗은 몸이 나의 기이하고 이상한 진짜 모습이라면, 옷은 이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기 위한 방편인 셈이다. “처음 이것을 입었을 때의 기쁨과 포근함 자랑스러움 안락함”(「꿈의 옷」)을 만끽하는 화자가 “옷을 전부 빼앗”기고 수치스러워”(「전문가의 사랑」)하면서도, “평소 입지도 선망하지도 않는 이 웃기는 옷을 사버렸다고, 다 끝났다”(「사치」)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비다. 비야. 새로 손질한 긴 머리카락이 젖고 드라이클리닝만 해온 카디건이 젖고 진짜 가죽으로 된 신이 젖고 속옷과 양말이 젖고…… 그들은 비참해졌다. 비가 내려서. 비 때문에 우리는 엉망진창이 되었군.
그들은 회상을 시작했다. 한때 그들은 대머리였고 옷은 입지 않았고 물에 녹지 않는 페인트를 발라 몸을 치장했고 미끄러지지 않는 고무 슬리퍼를 신고 녹색 옥상을 뛰어다녔다. 옥상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막 내리는 투명한 비를 온전히 머금을 수 있도록 관리되고 있었다. 그들은 잘 닦인 리놀륨 바닥 위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우우, 우우 소리를 지르며 춤을 췄다. 사람들은 경찰에 신고를 했다. 재미있는데, 그냥 두죠, 경찰이 말했다.
영원할 것 같던 기우제였다. 어쩌면 영원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행복했으니까. 이런 행복한 마음으로는 몇 날 며칠을 빌어도 소용없어. 우리는 거짓된 소원을 빌고 있는 거다. 깨달은 그들은 곧 기우제를 그만두고 집으로 내려갔다.
_「외계인 가족의 시」 부분
하늘에서 비가 내리자 외계인 가족의 옷과 머리가 볼품없이 젖는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그들은 대머리에 옷도 입지 않은 채로 “우우, 우우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던 과거를 회상한다. 머지않아 기우제를 끝낸 그들은 다시 각자의 역할로 돌아간다. 겉보기에만 화기애애한 가짜 가족의 역할놀이에서 초점을 거두면 신이인이 발견해낸 잠시간의 명랑이 보인다. 시 속의 경찰은 사람들의 신고에도 “그냥 두죠” 하고 답한다. 공권력조차 개입하지 못하도록 보호받는 외계인 가족의 춤판은 이후의 매끈한 일상과 대비를 이루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잠시나마 반짝이는 것을 볼 수도 있었겠으나”(「벗어나기」) “잠시 붙들어보려 했는데 흘러가”(「가오나시의 시」)거나 “잠시 이해하려던 시절이 지나”(「스프링」)가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이 시집을 읽는 또하나의 묘미다. 시인은 그 찰나가 비록 “사는 동안 잠시 날 달래줄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꿈의 도형」) 하더라도 한껏 누리고자 한다. 자신의 산문집에서 말한 바 있듯 “영원한 가짜 아닌 화악 시들어버리는 진짜의 마음으로”(『이듬해 봄』) 말이다. “순종적이면서 발칙하고 어수룩하면서 되바라진 화자가 세계와 어긋나면서도 그에 끼워맞추어지는 시적 순간들은 못 견디게 불편하고 그렇기에 견딜 수 없이 통쾌한 경험을 선사한다.”(문학평론가 성현아, 해설)
줄곧 ‘나’에서 출발해 허무한 찰나의 명랑을 획득하는 시편들은 “그러나 사랑을 할 수는 있다”(「해파리들」)는 문장으로 귀결한다. 「벽난로가(家)의 번영」의 화자인 벽난로는 “맹렬하게 사랑하”는 모든 것을 “녹여 없애거나 내쫓거나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숙명을 타고났다. 잿더미를 사랑하는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던 날에는 진심으로 바스라져 눕고 싶”을 만큼 고통받는 것처럼, 나와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유해하다. 그러나 신이인은 “눈이 퉁퉁 붓더라도/ 부딪치고 기를 쓰고 아파하면서” 그 사랑을 계속해나간다. “바닥을 밀어내”려는 자신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는 바닥이 자신을 “퍽 좋아”하므로 “멍이 들면/ 자랑이”(「스프링」)라고 여긴다.
먼 곳에 있는 대상에게로 향하는 신이인의 사랑엔 늘 얼마간의 수치와 자랑이 섞여 있다. 넘쳐흐르는 마음에 낙담하다가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일어선다. 무해한 사랑을 꿈꾸는 유해한 존재들이 들끓는 어지럽고 지저분하고 요란한 세계. “미인의 애인은 희극인이고,/ 시인의 애인은/ 되와 돼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듯 저편에 존재하는 누군가와 쉬이 사랑해버리고 싶어지는 세계. 시인은 무심코 시집을 펼친 독자를 “뒤에 태우고/ 먼길을 너무도 쉽게 가로질러” “멀고 먼 곳으로/ 혼자서는 집에 갈 엄두도 나지 않을 곳으로”(「쉬운 시」) 향해갈 것만 같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들을 껴안”아달라는 최초의 기대에 충실히 값하는 이 시집은 “어쩌면 처음부터 외계인이었는지도”(「꿈의 고백」) 모를 당신에게 쭈뼛쭈뼛 사랑을 담아 건네는 오래된 인사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팬이에요……”(‘인터뷰’에서)
못돼처먹은 시인, 못돼처먹은 시, 못돼처먹은 신, 그리고 아무렇게나 사랑스러운 우리의 못돼처먹은 신이인이 계속 요란스럽게 써나가기를 바라본다. 모든 고정된 것을 짓궂게 흔들어대다가 자기만의 리듬을 찾아낸 비성년 객체, 벌벌 떠는 힘으로 별별 일을 다 벌이는 비인간 사물. 사회에서 요구하는 평범한 인간이 못 되어서 못됐다고 비난받다가 못 되라는 저주를 껴입고서 못돼를 꼭꼭 씹어 먹기도 하는, 비행청소년동물의 모습을 한 그가 경계를 지우며 영영 날아다니길 빈다.
_성현아,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