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의 마지막 산문, 마지막 당부
시로 시대를 건너온 거인의 삶과 문학을 다시 만나다
한국 문단의 영원한 거목이자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른, 고(故) 신경림 시인의 2주기를 맞아 유고 산문집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가 출간되었다. 평생 시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정직하게 비추어온 시인의 맑고 깊은 사유를 한데 모은 책으로,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하면서도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보듬어온 거장의 문학적 철학이 오롯이 담겼다. 책의 제목은 널리 사랑받아온 시 「목계장터」의 구절에서 따왔다. 거창한 바위이기를 포기하고 기꺼이 ‘들꽃’과 ‘잔돌’의 자리로 내려가려 했던 신경림 문학의 본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경림 선생이 고뇌하며 걸어온 길이 곧 우리 문학이 고뇌하며 걸어온 길이요, 그게 한국문학사의 뼈대를 이룬다”라는 엮은이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이번 산문집은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며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노력했던 한 인간의 진솔한 자기 고백이자 성찰의 기록이다. 역사의 모진 풍파를 겪어내면서도 결코 사람에 대한 따뜻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시인의 맑은 목소리는 팍팍한 오늘을 견디는 독자들의 가슴을 조용히, 그러나 깊고 묵직하게 두드린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균형 잡힌 시론과
시와 삶의 일치를 향한 끝없는 영혼의 여행
제1부에서는 광복과 6·25전쟁, 4·19혁명, 군사독재, 그리고 6월항쟁에 이르는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한국시가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수용해왔는지를 날카롭고도 균형 잡힌 시선으로 고찰한다. 신동엽 김수영 김지하 조태일로 이어지는 저항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김춘수와 김종삼 등의 서정시와 모더니즘 시 역시 우리 문학사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는 성취로 바라본다. 무엇보다 민중·민족 담론에 방점을 둔 시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자기성찰이 없는 시가 아무리 옳은 소리만 골라 한다 해도 독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라고 단언하는 대목은, 역사의 아픔을 품되 문학적 완성도를 잃지 않으려 했던 신경림 문학의 단단한 뼈대를 보여준다.
제2부에서는 등단작 「갈대」를 발표한 이후 10년의 방황을 거쳐 『농무』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어떻게 자신의 시를 끝없이 갱신해왔는지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순수서정에서 리얼리즘으로 나아가고, 다시 민중적 가락을 천착했던 시간마저 어느 순간 자신의 시를 가두는 “낡은 옷”이 되었음을 직시하며 긴 쇄신의 시간을 감당해낸다. “나의 시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영혼의 여행일 수밖에 없다”라는 시인의 고백은 시와 삶의 일치를 향한 한 거장의 아름다운 여정을 묵직하게 증명한다.
제3부는 자연과 일상, 그리고 다채로운 사회 현안 속에서 길어 올린 깊고 따뜻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 밑바탕에는 자연에서 체득한 삶의 태도가 놓여 있다. 시인은 남한강을 곁에 두고 걸으며 강이 마을과 마을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이어준다고 말한다. 헤어지는 곳이 아니라 만나는 곳이며, 사람을 막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안아주는 강물의 이치는 곧 그가 평생 지향해온 소통의 윤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선은 교육, 환경, 통일 등 사회를 향한 발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시인은 거리로 내쫓기는 자와 내쫓는 자, 남과 북 사이에 가로놓인 단절을 짚으며 “가장 낮은 자세가 되어 상대를 높이면서, 상대를 존중하면서”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과거 조봉암 사건의 사법 살인을 돌아보며 “법도 역시 사람을 위해서 기능하는 것이어야 하며 (…) 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인간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인간적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진영 논리, 혐오, 불신이 만연한 지금, 이 문장들은 더욱 날카롭고 절실한 현재적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맑고 단단한 삶의 이정표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는 거센 풍랑 속에서도 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와 품위를 끝내 놓지 않으려 했던 한 시인의 치열한 자기고백이다. 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거대담론의 구호에 함몰되지 않으려 했던 문학적 긴장, 사람을 향한 깊은 연민, 그리고 자기 안을 깊이 들여다보려는 진실한 태도가 이 책의 의미를 유독 각별하게 만든다. 성공과 이익을 좇아 모두가 화려한 밖을 향해 내달리는 세상이다. 시인은 이 어지러운 궤도에서 잠시 비켜서서 고요히 ‘안으로 난 길’을 응시하라고 당부한다. 자신의 부끄러움과 모자람까지 숨김없이 드러내면서도 끝내 타인과 세계를 향한 다정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넉넉한 어른의 품과, 한평생 정직한 언어로 우리 곁을 지켰던 시인의 이 마지막 육성은 상실과 불안의 시대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먹먹한 위로와 경이로운 떨림으로 남을 것이다.
책 속에서
이런 사회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시를 쓰는 일에 회의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맑고 깨끗한 서정시를 쓰는 일이, 남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나 혼자만 제멋에 취해 살고 있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런 자괴감 같은 것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시를 쓰는 일에 신명이 나지 않았습니다. 신명이 나지 않으니 좋은 시가 써질 리 없었지요.
―「「농무」에서 「낙타」까지」 부분
그러나 언어가 공동체적 삶의 결정물인 이상 언어를 제재로 하는 시가 공동체적 담론에서 벗어날 수는 없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 더 중요한 것은 언어는 공동체적 성격도 가지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점이다. 개인의 사상이나 정서가 담겨 있지 않은 민족 혹은 통일의 시는 허구라는 말이 된다. (…) 자기 성찰이 없는 시가 아무리 옳은 소리만 골라 한다 해도 독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광주항쟁에서 6월항쟁까지」 부분
물풀 사이로 오리들이 도망치는가 싶더니 이윽고 자욱한 강 안개 속에서 배 한척이 나타났다. 그물을 치러 나가는 배였다. 내 친구가 인사를 하자 상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 엄마 한번 다녀가라고 하거라. 그 친구의 외가가 건넛마을로서, 강은 마을과 마을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강으로부터 세상을 배우고 강으로부터 문학을 공부했다. 강을 통해서 세상에 나가고 강을 통해서 사람을 만났다. 강이 내게는 길이요 학교였던 것이다.
- 「사람이 강을 닮고, 강은 사람을 닮고」 부분
생각해보면 내가 시를 쓰는 일은 늘 내 시로부터 도망치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그 도망은 완벽한 것은 되지 못했다. 내가 뿌리박고 사는 땅, 나와 함께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부터까지 도망칠 수가 없었으니까.
―「내 시로부터의 도망」 부분
나의 시는 나에 대한 탐구다. 내가 어떠한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길 찾기이며, 다른 존재와 어떠한 관계 속에 있으며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이고 모색이다. 또한 나는 시를 통해서 사물과 접촉하고 소통하고 이해하며, 그것들을 시 속에 수용한다. 나는 결코 시가 가진 사회적 성격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 혼자 독립된 존재이지만,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떠나 있는 존재는 못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상력과 개인적 상상력의 조화가 있을 수 있다면 나의 시는 그것을 지향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시는 왜 존재하는가」 부분
우리 사회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가위 모양으로 벌어져 많은 사람들은 거리로 내쫓겨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하고, 경제논리만을 앞세운 마구잡이 개발로 사람뿐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할 모든 생명체들이 죽어가며, 북쪽의 고집스러운 핵 외교와 남쪽의 지혜롭지 못한 대처가 검은 먹구름이 되어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많은 논자들은 지적한다. 오체투지를 보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우리가 가장 낮은 자세가 되어 상대를 높이면서, 상대를 존중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보는 일이 다시금 중요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오체투지와 소통의 문제」 부분
신경림 선생이 말하는 ‘내가 살아온 시대’는 일제강점기와 전쟁과 군사독재가 이어지는 빈곤과 폐허의 시대였다. 참혹한 시대를 다 겪으며 살아왔다. 하루도 예외가 없었고 한시도 빠져나올 수 없던 시간이었다. 그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개인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집단 트라우마 같은 것을 지닌 개인이다. 그 집단 트라우마를 안고 가장 예민하게 고뇌하는 이가 시인이다. 여린 심성을 지닌 사람일수록 고뇌가 크다. (…) 신경림 선생이 고뇌하며 걸어온 길이 곧 우리 문학이 고뇌하며 걸어온 길이며 그 길이 한국문학사의 뼈대를 이룬다.
―「엮은이의 말」 부분
추천사
신경림 선생이 고뇌하며 걸어온 길이 곧 우리 문학이 고뇌하며 걸어온 길이며 그 길이 한국문학사의 뼈대를 이룬다. 선생의 산문을 읽고 있으면 ‘그래, 이게 있는 그대로 인간의 정직한 모습이지’ 하는 생각이 든다.
도종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