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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텔 상세페이지

빌헬름 텔작품 소개

<빌헬름 텔> 민중 봉기의 신호가 된 빌헬름 텔
이 작품은 1804년 3월 17일 바이마르에서 초연되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실러는 작품을 집필하면서 역사서를 참고했으나, 이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스위스 독립 투쟁사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을 희곡 기법상 축소 혹은 확대하면서 빌헬름 텔의 운명을 좀 더 부각시켰다. 추디의 ≪스위스 연대기≫에서는 여러 사람들 중의 한 인물이었던 텔의 운명이 희곡에서는 핵심이 된다. 텔은 주인공으로 떠오를 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는 일반적인 민중 봉기의 신호가 된 것이다.
지배자에 의해서 아들 머리 위의 사과를 쏘라고 강요받고 후일 압제자를 활로 쏘아 살해함으로써 복수한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서양에 널리 퍼져 있었고, 멀리 동방에까지 알려진 이야기다.

“강한 자는 혼자 있을 때 가장 강합니다”
극 중에서 “단결하면 약한 자도 강력해지지요”라며 정치적 저항 운동에 가담하라는 제안을 받지만 텔은 위와 같이 단호하게 일축한다. 실러는 프랑스 혁명에서 나타난 과격한 유혈 혁명의 야만성에 반대하며 우선은 미적인 교육을 통해서 인간의 자율성을 고양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실러의 이런 이론적인 성찰이 희곡 <빌헬름 텔>에 투영된 것이다. 텔의 정당방위와 민중들의 봉기가 합일되어 혁명은 성공하고 다시 자유의 세계가 열린다. 하지만 텔은 비정치적인 자연인이며, 철두철미 자력에 의한 구원을 신봉하는 독립적인 행동가다.

전 세계에서 애국적인 극작품으로 사랑을 받는 작품
<빌헬름 텔>은 외세에 의해 임명된 총독들의 폭정에 대한 민중 봉기라는 주제 이외에도 폭군 암살이나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 등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바이마르 초연과 베를린 공연 당시, 정치적인 논란과 검열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 희곡에 대한 열광은 이어졌다. 이 희곡은 독일이나 스위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애국적인 극작품으로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동화로도 번안되어 인기를 누리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학교 교재로 자리를 굳히고 있으며, 여기 나오는 시구들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언이 되었다. 이 책에서도 5막 운문희곡인 <빌헬름 텔>의 시행을 살려 번역해 원문의 맛을 살리고자 했다.


저자 프로필

프리드리히 폰 실러 Friedrich von Schiller

  • 국적 독일
  • 출생-사망 1759년 11월 10일 - 1805년 5월 9일
  • 경력 예나대학교 역사학 객원교수

2015.03.10.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자 -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는 독일 서남부의 네카르 강변에 있는 마르바흐의 소시민 가정에서 1759년 11월 10일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영주(領主)인 카를 오이겐 공작의 명에 의해서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8년 동안 방학도 없이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다. 처음엔 법학을 공부했으나 의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졸업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하급 군의관이 됐다. 학생 시절에 그는 몰래 문학 작품을 탐독하며 습작을 했다. 철학 교수 아벨의 권유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은 것은 그에게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자비 출판한 처녀작 <군도>가 1782년 1월 13일 만하임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 것을 계기로 그는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공작의 저술 금지령을 피해서 그는 1782년 9월 22일 밤에 만하임으로 도주한다. 그는 만하임 극장에서 전속 극작가로 첫출발을 하지만 계약이 만료되자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 그리고 바이마르를 떠돈다. 그러다가 예나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로 초빙되어 1789년에 예나로 이주했다. 그는 여기서 역사와 미학 강의를 하지만 학생 수의 감소와 신병으로 얼마 후 사직했다.
실러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괴테와의 만남이었다. 1794년부터 괴테와 실러의 본격적인 친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자주 만나서 문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많은 서신을 교환하며 공동 작업을 했다. 특히 1802년에는 실러가 예나에서 바이마르로 이사를 해 이들의 친교와 공동 작업은 더욱 강화됐다. 실러는 1805년 5월 9일 오랫동안 앓던 지병으로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46세의 나이로 마감한 실러의 일생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소도시에서 태어나 평생 소도시에서만 살았다. 그가 가본 대도시는 1804년 봄에 약 4주간 여행한 베를린뿐이었다. 물론 당시엔 여행하기가 지극히 어렵긴 했지만 그는 평생 빈이나 파리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실러는 작가로서 시, 소설, 역사서 및 미학 논문, 그리고 희곡을 썼다. 생계유지를 위해 몇 개의 문학잡지를 간행하기도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엔 아직 저작권 제도가 정립되지 않았고 독자층도 제한되어 있어서 글 쓰는 사람들이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는 어려웠고 영주나 독지가의 후원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년에 가서야 돈을 많이 받는 극작가가 되었지만 그는 한평생 빚에 쪼들리는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또한 병약한 몸으로 일생 동안 신병에 시달렸다.
실러는 정치적인 부자유와 변혁의 시기에 살면서 개인적으로는 늘 경제적인 어려움과 병고에 시달려야만 했다. 따라서 그의 문학 작품에서는 항상 현실적인 삶과 높은 이상의 세계가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역자 - 이원양
이원양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문학박사)했다. 독일 괴테 인스티투트 디플롬을 받았고 쾰른 및 함부르크 대학에서 독문학을 연구했으며 뮌헨 대학교 연극학연구소에서 연극학을 연구했다. 한국브레히트학회 회장, 한국독일어교육학회 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 그리고 한양대학교 문과대학장을 역임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 정부로부터 1등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이며 한국브레히트연극연구소(Bertolt-Brecht-Zentrum Korea) 소장이다.
지은 책으로는 ≪브레히트 연구≫(1984), ≪독일어 기초과정≫(1995), ≪우리 시대의 독일연극≫(1997), ≪독일연극사≫(2002), ≪만나본 사람들, 나눈 이야기≫(2006)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한국의 봉함인≫(2005), ≪베르톨트 브레히트≫(2007) 등이 있다. 번역 희곡으로는 브레히트의 , 크뢰츠의 <거세된 남자>(1987), <수족관>(1988), 슈트라우스의 <재회의 3부작>(1997), 브라운의 <베를린 개똥이>(2007),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2008), ≪서푼짜리 오페라≫(2008),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2008), 실러의 ≪간계와 사랑≫(2008) 등이 있다.

목차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제4막
제5막

<빌헬름 텔>의 지리적 배경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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