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국 중기 사상가 신도의 철학서.
도가에서 출발한 신도의 사상은 전국 시기라는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법치를 옹호하게 된다. 신도는 치국의 문제에서 법제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권세의 작용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이러한 신도의 중세(重勢) 사상은 후기의 법가 이론이 성립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신도의 도가적 사상, 법가적 사상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책은 전희조(錢熙祚)의 『수산각총서(守山閣叢書)』에 수록된 『신자』를 저본(底本)으로 삼아 번역역한 것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가오류수이(高流水)가 역주한 『신자전역(愼子全譯)』[구이저우인민출판사(貴州人民出版社), 1996]을 참고했다. 그리고 일문(逸文)과 관련해 『군서치요(群書治要)』와 1935년에 왕쓰루이(王斯睿)가 저술한 『신자교정(愼子敎正)』에 수록된 내용을 상세하게 대조해 교감(校勘)했다.
『신자(愼子)』 출현의 사회적 배경
신도(愼到)는 전국(戰國) 중기의 중요한 사상가다. 중국 역사상 춘추(春秋)와 전국 시기는 대변혁 시기로서 일대 전환기에 해당한다. 정치상 주(周) 왕조의 명맥은 유지되었지만 천자(天子)가 제후를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해서 왕실은 쇠락했다. 경제적으로 철기와 우경(牛耕)의 보급으로 사회적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대량의 토지가 개간되었고, 급속한 사유화가 진행되었다. 사상ㆍ문화 방면에서는 공자 같은 사상가의 출현으로 사학(私學)이 발전해, 교육과 문화가 귀족의 독점에서 벗어나 대중화되는 데 공헌했다. 춘추 시기 학술상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분위기는 전국 시기에 더욱 발전하면서 사상은 상호 영향을 주었고, 각 사상들의 통합 국면이 출현하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 사상가는 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통한 중국 통일의 이론 모색에 매진하기도 했다.
신도(愼到)의 도가(道家)적 사상
신도의 자연 숭상 사상은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 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노자가 주장한 “무위(無爲)”가 인위적인 것을 반대하며 소극적으로 자연적인 혜택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신도의 자연 상태란 사람이 자연을 이용하는 상태를 의미했다. 신도가 숭상하는 자연 사상은 도가에 근거했지만 노자의 소극적인 도가 사상의 일면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또한 신도는 “자연 순응”의 용인(用人) 사상을 주장했고 이와 연관 지으면서 ‘자연의 규칙을 준수하고 백성의 정서에 순응한다’는“인순(因循)”의 개념을 도출했다. 신도는 이런 자연 규율을 준수해 직무를 수행하고 동시에 민심에 순응하면 국가는 곧 흥성하지만, 이런 자연 규율을 어기면 국가는 위태롭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용인(用人)과 관련해서 군주는 무위(無爲)를, 신하는 유위(有爲)를 해야 한다는 사상을 제창했다. 신도의 “군무사(君無事)” 하며 “신유사(臣事事)” 한다는 사상은 노자의 “무위이치(無爲而治)”사상의 계승과 발전이라 할 수 있겠다. 노자가 언급한 무위 사상이란 주로 치국의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제시한 것이지만 포괄적인 원칙을 제시했을 뿐 구체적인 방법을 언급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신도의 용인(用人) 사상은 노자의 무위 사상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비교적 구체적인 방법과 시책의 제시라 할 수 있다.
신도의 법가(法家)적 사상
신도는 치국의 문제에서 법제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한편으로는 권세의 작용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군주가 법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세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군주는 법제의 관철은 물론이고 법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도 부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권세는 특정한 조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의 “중세(重勢)”는 법치 사상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며, 초기 법가의 중세파(重勢派) 관점은 후기 법가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법가를 집대성했던 한비(韓非)는 '난세(難勢)' 편을 저술하면서 신도의 중세(重勢) 사상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고, 중세 사상에 영향을 받아 법(法)·술(術)·세(勢)를 결합해서 비교적 완전한 법가 이론 체계를 수립해 국가와 백성을 통치하는 이론 체계를 완성하기도 했다.
신도는 국가 통치에 유일하게 법치만을 근거로 해야 하는 것은 오직 법치의 실행을 통해서 상벌의 객관적인 표준의 도출과 상하의 화목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법치의 실행을, 사사로운 원한을 제거하고 공평과 정의를 실현해 상하가 화목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로 삼았다. 또한 법치로써 사사로운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는 점을 법제의 가장 큰 공로로 여겼다. 신도는 입법(立法)을 사행(私行)과 대립시키면서, 입법으로 사사로움을 제어함으로써 법치의 공정성과 배타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군주”와 낡존현(尊賢)”을 대립시켜 “군주가 직위에 있으면 현자는 존중받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법치(法治)와 인치(人治)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주장으로, 신도 사상의 한계다.
『신자(愼子)』의 집일(輯佚)과 저본(底本)
량치차오(梁啓超)는 일찍이 <고서진위급기연대(古書眞僞及其年代)>라는 문장에서 신무상(愼懋賞)이 집일한 『신자내외편』이 위서임을 처음 지적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뤄건쩌(羅根澤)과 팡궈위(方國瑜) 등의 학자가 위서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이후 궈모뤄(郭沫若), 판원란(范文瀾), 후스(胡適), 장다이녠(張岱年), 허우와이루(侯外盧), 양룽궈(楊榮國) 등의 학자들은 『신자』를 언급할 때 원론적으로 『자휘』본을 주로 참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