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대한 열정적 추구로
20세기를 열어젖힌 천재
시공간을 재편한 현대물리학의 초석
◎ 도서 소개
“나는 평안과 행복 그 자체를 목표로 여긴 적은 한 번도 없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20세기의 아이콘, ‘세기의 인간’을 다시 읽다
20세기가 과학과 기술의 시대라면,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한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바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타임》은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 ‘세기의 인물Person of the Century’로 아인슈타인을 선정하며, 그를 “모든 과학자의 상징이자 인류가 남긴 가장 빛나는 지성”으로 평가했다. 『클래식 클라우드 038 아인슈타인』은 이 위대한 물리학자를 단순한 천재의 전설로서가 아니라, 시대를 직시하며 ‘권위에 저항한 인간’으로서 다시 조명한다. 국립 경상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이자 과학 저술가인 저자는 “권위에 반항하고 자유를 사랑한 인간” 아인슈타인의 내면과, 그가 어떻게 시공간을 다시 쓴 이론을 완성했는지를 정밀하게 탐구한다.
권위에 반항한 소년, 세계를 바꾼 사유의 여정
책은 뮌헨의 평범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학교의 권위적 교육과 사회의 억압을 거부하며 독창적 사유를 키워간 과정을 세밀히 그린다. “운명은 권위를 멸시한 나를 벌주기 위해 권위자로 만들었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그는 일찍이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반항의 아이였다. 이미 15세에 김나지움을 스스로 중퇴하고, 군복무를 거부하기 위해 독일 국적을 버린 아인슈타인의 선택은 그 반항심의 결정체였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이야말로 훗날 상대성이론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저자는 아인슈타인의 반항이 단순한 반체제적 행동이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사유의 용기’였음을 강조한다.
시공간을 다시 쓴 사유의 구조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 광양자 가설, 브라운운동 논문 등 20세기 물리학을 근본적으로 바꾼 네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당시 특허청 직원으로 일하며 자유롭게 사유했고, 뛰어난 물리학적 직관으로 그 누구보다 세계의 물리적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클래식 클라우드 038 아인슈타인』은 단순한 전기가 아닌, 그의 과학적 통찰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물리학자의 시선으로 깊이 있게 풀어낸다. 저자는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아인슈타인의 실험적 사고, 철학적 신념, 그리고 인간적 고민을 균형 있게 그려낸다. 특히 권위주의적 과학 패러다임을 넘어서 자유로운 사유를 가능케 한 그의 ‘지적 용기’를 중심으로, 과학이란 무엇인지 새롭게 묻는다.
과학과 인문을 잇는 새로운 교양의 문
『클래식 클라우드 038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과학자의 생애를 단순한 연대기나 업적의 나열로 다루지 않는다. 독자는 뮌헨의 소년 시절에서부터 취리히에서의 청춘, 특허청 직원으로서 ‘기적의 해’를 맞은 베른 시절, 그리고 프린스턴의 연구실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나간 도시와 시대의 공기를 함께 걷는다. 수많은 방정식 속에서 그는 언제나 ‘왜?’를 묻는 한 사람의 여행자였다. 이 책은 그 여행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과학과 사유, 그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다시 묻는 여정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 책 속에서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의 성격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러한 태도, 즉 권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반항심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모든 종류의 권위적인 억압을 지극히 혐오했고 참고 견디지 못했다. 삶에 있어서나 물리학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태도로 주위와 마찰을 빚기도 하고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으나 아인슈타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오랜 세월 동안 모든 과학자가 믿어왔던 내용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결국 상대성이론에 도달할 수 있었던 데는 이렇게 권위에 반항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prologue 세기의 인간 p.8
아인슈타인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세 개의 국적을 가졌으며, 두 번 결혼했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또한 유대인, 평화주의자, 시온주의자였으며, 반유대주의의 표적으로 살해 위협을 받았고,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을 때는 대통령 제의도 받았다. 그는 노벨상을 수상했고, 살아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영예를 받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말할 때 언제나 부수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과학이었고, 그런 사실은 아인슈타인의 인생 내내 변함이 없었다. 아인슈타인도 “평안과 행복 그 자체를 목표로 여긴 적은 한 번도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prologue 세기의 인간 p.10
프로이센의 군국주의가 위세를 떨치던 19세기 말 독일에서, 군대는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남자아이들은 대체로 제복을 입은 군인을 선망했고, 황제와 조국을 위해 충성을 바치는 걸 상상하다가 공을 세워서 출세하기를 꿈꾸기도 했다. 학교의 교육도 이러한 문화를 반영해서, 질서와 규율이 강조되었고 절대복종의 원칙이 중요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군국주의 일본과 일본의 사관학교를 나온 대통령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처음부터 군대에 대해 본능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열광하던 군대의 화려한 퍼레이드를 보면서 “나는 커서 저런 불쌍한 사람이 되기 싫어요”라고 부모님에게 말했다는 기록은 어린 아인슈타인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1 반항: 어린 시절 p.25~26
박사학위도 아직 받지 않고, 대학에 근무하는 것도 아닌 특허청 직원이,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놀랍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1905년을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라고 칭한다. 하지만 1905년 새해가 밝았을 때, 크람가 49번지에는 아무 조짐도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아침이면 크람가로 나와 특허청으로 향했고, 저녁에 돌아와서는 한스 알베르트를 돌보았다. 일요일이면 파이프를 물고 밀레바와 함께 유모차를 밀며 거리를 돌았다. 평온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아이디어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이가 잠든 밤이 되면 그는 거실의 큰 탁자에 앉아 노트에 계산을 했다.
-4 행복: 베른의 아인슈타인 p.148
플랑크, 네른스트, 루벤스, 바르부르크 네 사람이 아카데미에 아인슈타인을 추천하면서 올린 보고서는, 이 단계에서 내릴 수 있는 아인슈타인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를 보여준다.
“종합해서, 현대물리학의 많은 중요한 문제 중에서 아인슈타인이 두각을 나타내지 않은 문제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빛의 양자 가설처럼, 그가 때때로 사변적으로 도를 넘는 주장을 할 때도 있다는 사실로 그를 너무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가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가장 정밀한 자연과학에서도 진정한 혁신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그는 중력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데, 어떤 성공을 거둘 것인지는 미래만이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8 영광: 베를린의 아인슈타인1 p.280
아인슈타인이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배제되기는 했지만, 그는 1944년, 원자폭탄이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섰을 때 폭탄에 대한 내부 사정을 알게 되었다. 한때 그의 조수였던 오토 슈테른이 1944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서 아인슈타인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전쟁 이후의 국제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군비경쟁이 시작되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끔찍한 파괴를 가져올 누군가의 선제공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 이후의 정치적 상황은 워낙 복잡하게 전개되므로 여기서 그 내용을 따라갈 필요는 없겠다. 이 문제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주로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추구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실제의 역사는 대체로 아인슈타인이 원하는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10 어둠: 베를린의 아인슈타인3 p.5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