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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장면들을 정밀하게 소환해 예술이라는 프리즘으로 관통시킴으로써, 삶이라는 종이에 숨겨진 무늬를 드러낸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자전적 작품 <말하라, 기억이여>는 바로 그런 작업의 기록처럼 읽힌다. 러시아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혁명으로 인해 조국을 떠나 망명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인생이 이 책의 배경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히 삶의 사건을 정리한 자서전이라기보다, 기억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미 사라진 세계를 다시 불러내는 문학적 작업에 가깝다. 책 속에는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놀라울 만큼 섬세하게 되살아난다. 시골 저택의 응접실에서 어머니가 영어 책을 읽어주던 밤의 기억이 그렇다. 극적인 장면에 이르면 어머니는 일부러 말을 늦추며 긴장감을 높였고, 루비와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던 손이 책장 위에 머물러 있었다. 어린 나보코프에게 그것은 따뜻한 가족의 풍경이었지만, 성인이 된 화자는 그 반지의 투명한 면 속에서 훗날 망명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그것을 팔아야 했던 시간을 함께 떠올린다. 평온했던 장면 속에 이미 미래의 상실이 겹쳐져 있는 것이다. “ 내가 자러 가기 전에 어머니는 종종 우리 시골 저택의 응접실에서 영어책을 읽어줬다. 주인공이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예상 밖의 위험과 맞닥뜨리는 극적인 대목에 이르면, 어머니는 말을 늦추면서 불길하게 뜸을 들였고, 낯익은 선홍색 루비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손을 넘겨야 할 책장 위에 올려두었다(만약 내가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뛰어났다면, 그 반지의 투명한 면들 속에서 방, 사람들, 불빛들, 빗속의 나무들같이 그 반지를 팔아 꾸려나간 망명생활 전반을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 역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아버지가 공중으로 던져져 하늘 위에 떠오르는 장면은 마치 교회 천장화 속 인물처럼 장엄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곧 장례식의 이미지가 겹쳐지며 그가 맞이하게 될 비극적인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린 시절의 환희와 훗날의 슬픔이 하나의 기억 속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방식이 바로 나보코프가 기억을 다루는 독특한 방식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나보코프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 나를 빚어낸 도구의 정체, 삶이라는 인쇄지에 예술의 등불을 비춰야 그 독특한 무늬가 보이도록 내 삶에 특별히 복잡한 워터마크를 찍어놓은 그 알 수 없는 롤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환경적 요인에서도 유전적 요인에서도 찾아낼 수가 없다. ” 사람의 삶을 설명할 때 우리는 흔히 환경과 유전을 떠올린다. 그러나 나보코프에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 찍힌 무늬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워터마크처럼 숨어 있다가 예술의 빛을 비출 때에만 모습을 드러난다. <말하라, 기억이여>는 바로 그 빛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본 기록이며,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명보다 예술이 필요하다는 그의 단호하면서도 경외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준다. _______ 고백하건대, 나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나는 마법의 융단을 사용한 뒤,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의 무늬가 포개지도록 접어두는 것을 좋아한다. 방문객이 걸려 넘어져도 상관없다. 시간이 없는 상태를 최고로 즐길 수 있는 것—풍경은 무작위로 골라도 된다—은, 내가 희귀한 나비들과 그들의 먹이식물 한가운데 서 있을 때다. 이것은 무아경이며, 이 무아경 뒤편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있다. 마치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적인 진공과도 같다. 태양과 돌과 하나가 되는 느낌. 관계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대위법對位法의 천재든, 운 좋은 필멸자의 비위를 맞춰주는 상냥한 유령이든, 감격하게 되는 떨림. 말하라, 기억이여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오정미 저 #말하라기억이여 #블라디미르나보코프 #문학동네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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