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복도, 고향도, 이별도 없는 세대
우리의 사랑은 잔인하고, 우리의 젊음에는 젊음이 없다."
새로운 번역,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폐허문학, 볼프강 보르헤르트 전집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
★전후戰後 독일문학 재건을 선언한 기념비적 작품집
★시대를 초월한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 세상의 모든 불의에 저항한 외침의 문학
전후 독일의 천재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시와 단편, 희곡을 한 권에 담은 전집 『그리고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보르헤르트는 대부분의 작품을 병상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약 2년 동안 써냈다. 짧은 활동 기간에도 그가 현대 독일문학사에 남긴 영향은 지대하다. 스스로 체험한 현실을 응축되고 간명한, 직접적인 일상 언어로 생생하게 작품에 담아 독일사회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고, 하인리히 뵐, 한스 베르너 리히터 등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문학에 새롭게 등장한 흐름인 ‘폐허문학die Trümmerliteratur’의 시작을 알렸다. 폐허가 된 독일의 현실을 직시하고 전쟁을 일으킨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으로 기성세대의 질서에 저항하는 젊은이의 대변자로 떠오른 보르헤르트. 그의 글은 현실적이고 사회비판적인 문학을 추구하며 현대 독일문학을 주도한 ‘47그룹’의 작가들-하인리히 뵐, 피터 바이스, 마르틴 발저, 귄터 그라스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전후의 유럽과 미국, 일본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보르헤르트 생전에 출간된 시집『가로등, 밤 그리고 별들』(1946), 희곡 「문밖에서」(1947), 산문집 『민들레』(1947)와 작가 사후에 출간된 산문집 『이번 화요일에』(1947), 유고 시와 유고 단편을 더해 한 권으로 모은 ‘전집’이다. 일찍이 국내에 소개되어 많은 작가들과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희곡 「문밖에서」, 단편 「이별 없는 세대」를 포함, 약 30여 편의 시와 40여 편의 산문이 수록되었다. 독일 로볼트 출판사의 『Wolfgang Borchert: Das Gesamtwerk』 1982년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박병덕 교수가 새롭게 번역하고, 당시 시대 상황과 표현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본문 말미에는 하인리히 뵐, 율리우스 밥의 추천사와 함께 김언, 김이듬 시인 등 볼프강 보르헤르트를 추억하는 국내 문인들의 추천사를 실었다.
암울한 시대, 갈 곳을 잃은 등장인물들, 작품 전반에 짙게 드리운 죽음의 이미지로 볼프강 보르헤르트를 기억하는 독자들에게 그의 글은 어렵고 어둡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전집의 형태로 만나는 『그리고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그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보르헤르트는 쉽고 간결한 평범한 사람들의 말과 글로 공감을 이끌어내며, 힘든 상황에서도 순수한 웃음을 잃지 않은 이웃을 따뜻한 시선으로 조명하는 데 집중했다. 또한 언어유희, 단어의 반복과 나열, 일상 언어의 적극적인 사용이 돋보이는 작품들에서는 젊은 작가의 실험적인 면과 타고난 언어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보르헤르트의 외침은 죽은 자들을 위한 것. 그의 분노는 역사의 쾌적함으로 자신들을 덮어씌운, 살아남은 자들을 향한 것이었다.”_하인리히 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그리고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비극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문학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또한 새로운 독일문학으로 거듭나기 위한 서독 문인들의 치열한 노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보르헤르트는 전쟁 이전과 이후의 독일을 정확하게 기술함으로써 망가진 세대의 파괴된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주목했다. 하지만 절망과 허무주의를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반전反戰의 메시지와 함께 인간 사랑의 회복을 이야기했다. 시대의 광기와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개인이 물질적·정신적 폐허에 내던져질 위험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보르헤르트는 그런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부당한 것에 대해 한 명 한 명이 용기를 갖고 확실히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에 대한 목마름과 불의에 대한 저항을 담은 외침의 문학, 절망과 허무주의를 딛고 일어선 보르헤르트의 글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 수록 작품 소개
『가로등, 밤 그리고 별들』: 보르헤르트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쓴 시 가운데 엄선한 14편의 시를 모은 시집. 보르헤르트의 시는 그가 산문으로 창작의 중심을 옮기기 전 단계로 알려져 있으나, 삶에 대한 감정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어 그의 예술적 재능을 잘 보여준다.
『민들레』: 1945년 말부터 1946년 초까지 보르헤르트가 병상에서 쓴 글을 모은 산문집. 감옥에서 겪은 체험을 담은 「민들레」, 기성세대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 작품 「이별 없는 세대」, 고향 함부르크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도시」 연작 등 12편의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문밖에서」(1946) : 병상에서 일주일 만에 완성한 작품. ‘공연하려는 극장도 없고 보려는 관객도 없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부제와는 달리, 방송극으로 제작되어 독일 국민들의 엄청난 반응을 이끌어낸 희곡. 주인공 ‘베크만’이 겪는 고통과 암울한 현실을 사실성 있게 표현하면서, 전쟁의 공포와 가족을 잃은 슬픔,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 등 격렬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전쟁을 함께 체험한 동시대인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전후 독일사회의 참담함과 이기주의, 속물근성을 고발한 작품으로, 독일 ‘폐허문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화요일에』: 1946년 가을부터 1947년 여름 사이에 쓴 글 19편을 모은 산문집. 작가 사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볼링장」, 「네 명의 병사」 등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으로 인해 사람의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군인의 비극을 이야기하면서도, 「세 어두운 왕」, 「밤에는 쥐들도 잠잔다」에서는 전쟁을 견뎌내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오월에, 오월에 뻐꾸기는 울부짖었다」, 「길고 긴 도로를 따라서」 같은 작품에서는 보르헤르트 문학의 특징인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언어 사용, 장소와 시간에 대한 독특하고도 감미로운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유고 시」: 『가로등, 밤 그리고 별들』에 실리지 않은 초기 시 가운데 인간 보르헤르트를 깊이 이해하는 데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은 15편의 시를 추렸다.
「유고 단편」: 부정적인 현실 인식, 허무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품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보르헤르트를 접한 사람들에게 작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8편의 산문. 상처 입은 사람 사이에 싹트는 우정(「쉬쉬푸슈」), 신의 부재와 전쟁의 비참함 속에서도 삶을 이어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저 위에서 저 위까지」,「빵」)을 비롯해 반전反戰과 평화의 메시지로 가득 채운 단편들을 실었다. 특히 평화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불의와 부정에 ‘아니요!’라고 외쳐야 한다는 그의 마지막 단편 「그러면 답은 딱 하나뿐이다!」는 전쟁과 죽음에 무신경한 오늘의 사람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