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국가의 균형을 이룬 위대한 정승들
사대부 정치의 정점에서 국가경영을 말하다
창비 한국사상선 제8권 『유성룡·이항복·김육·채제공: 유교정치를 구현한 명재상들』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시기 조선의 재상 중에서 공적이 두드러지며 다양한 저술을 남긴 인물들을 다룬다. 선조 때 임진왜란 전황을 통솔하고 전후 처리에서도 큰 역할을 한 유성룡과 이항복, 효종 때 대동법의 실시를 추진한 김육, 그리고 정조를 보좌하며 실학군주로서 치적을 이루도록 도운 채제공, 이렇게 네 사람을 추려내 그들의 글과 말을 엮어냈다.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았다. 조선왕국의 이론적 설계사였던 정도전은 건국 초기 왕실의 세도정치와 신하들의 당쟁을 우려하여 ‘밝은 군주와 어진 신하의 만남’, 즉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 제도에서는 3정승이 6판서 및 여러 관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왕과 논의하는 ‘권력 균형자’의 역할을 맡았다. 창비 한국사상선 제3권 『세종·정조』가 이러한 조선왕국에서 ‘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다루었다면, 제8권은 조선을 대표하는 경세가들의 실천과 사상을 통해 조선이라는 유교왕국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고자 했다.
국난에 맞서 빛을 발한 재상 정치의 주역들
서애 유성룡(1542~1607)은 경북 안동 출생으로 21세 때에 퇴계 이황을 찾아가 제자가 되고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이 선조를 호종하면서 보여준 분별력과 외교력은 단순히 조선이라는 왕조를 수호한 데 머물지 않고 나라 전체를 환란의 위기에서 벗어나게끔 한 것이었다. 유성룡 편의 2장에 정선하여 수록된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전모를 세세하고 정확히 담아낸 국가적 기록으로 큰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이 소개하는 네 명의 재상 모두 국가 재상이기 전에 선비였지만, 유성룡이야말로 유학-주자학에 매진한 학자였다. 유성룡은 당시 신진학자들이 양명학을 공부하며 주자학을 비판하는 분위기에서, “행(行)을 중요시하면서도 지(知)를 더욱 귀하게 여긴다”(52면)라며 이를 절묘히 수렴하는 자신만의 학문방법론을 제안한다. 다시 말해 유성룡에게 양명학은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지나치게” 된 것으로, 그는 양명학의 문제의식을 수긍하면서도 지(知)의 측면을 좀더 강조하는 참된 지, 즉 진지(眞知)를 더 높은 가치로 상정했다. 이같이 더 높은 지향점에 대한 끝없는 탐구는 유성룡의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이는 임진왜란 당시 그가 보여준 사명감과 책임감, 그리고 면밀하고 구체적인 기록의 정신으로 발현되었다.
『징비록』 속 몇몇 장면들은 유성룡의 진가를 보여주는데, 그중에서도 선조와 명의 사천사 간의 회담에서 선조의 폐위가 언급되자 유성룡이 나서서 명의 장수와 담판을 지으며 조선의 입장을 강하게 피력해 선조 폐위 논의를 되돌린 장면은 이 책의 백미다. 당시 조공체제하에서 약소국 재상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지혜를 선보인 것이다. 그밖에도 임진왜란 주요 요충지 전투에서 유성룡이 보여준 여러 지략들은 그가 말한 진지(眞知)가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유성룡을 한 사람의 명재상일 뿐 아니라 주체적이고 지적인 리더십을 갖춘 사상가로 볼 수 있는 근거다.
이항복(1556~1618)은 유성룡보다 14세 연하로, 임진왜란 당시 도승지로서 선조의 피란길을 함께했고, 전쟁 내내 유성룡을 적극 옹호하고 협조하면서 전쟁 종식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경북 안동 출신의 유성룡과 달리 서울 명문 출신에 학술적 배경도 달랐던 이항복은 당파적으로는 서인에 속했지만 학통의 차이에 연연하지 않았다. 율곡학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퇴계 이황의 학술적 업적을 크게 샀던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 개인사를 제쳐두고 결연히 국사를 우선시했고, 사대부들이 노동을 경시하는 풍토를 안타까워했다. “내가 걸어온 실상을 조용히 살펴보니 문(文)도 아니고 무(武)도 아니고, 농업도 상업도 하지 않았으니, 공연히 천지 사이에 한낱 커다란 좀벌레에 지나지 않을 따름”(168면)이라는 이항복의 자기성찰은 현재에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세의 대가들
김육(1580~1658)은 인조 대부터 효종 대까지 활동한 명재상으로, 광해군 집권기에 북인정권에 맞서다가 낙향해 십여년간 두문불출한 뒤 인조반정 이후 왕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입성했다. 그때 김육의 나이가 44세였고, 그 뒤 줄곧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7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쟁 후의 복구와 민생 회복에 매진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대동법이다.
대동법이란 17세기 당시 백성들에게 부과되었던 부역의 부조리함과 과중함을 덜고자 세금을 토지 기준으로 통합하는 법령이다. 이 방식이 관철되면 부역을 지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유리하고 토지를 소유한 양반계층에게는 불리했다. 이에 지배층의 반발이 거셌지만 백성들은 “논밭과 마을에서 춤을 추며 개들이 아전을 보고도 짖지 않”(267면)았을 정도로 환영했다. 여러 부실한 면이 있긴 했지만, 대동법은 당시로선 무척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이처럼 김육이 대동법을 평생의 숙제로 삼게 되었던 사상적 근거는 ‘편민익국(便民益國)’이었다. 이는 김육이 산골에서 숨어 지내며 농사를 지을 때부터 품어왔던 뜻으로, 실용과 공리의 정신으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그의 뚝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책에서는 김육의 대동법 관련 논설을 비롯하여, 명청 교체기에 바닷길로 명나라 사행을 떠나며 남긴 기록 「중국사행기:『조경일록』」, 그의 생활 주변을 묘사한 산문 「구루정기」, 그리고 화폐의 주조와 통용에 관한 글 등을 소개한다.
채제공(1720~99)은 18세기 영정조 집권기의 재상으로,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당파적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에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그를 바로 곁에서 보좌했다. 정조가 채제공을 불러 직접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선대왕(영조)께서 일찍이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나와 너희 부자 사이를 두루 온전히 하려고 노력한 것은 채 아무(채제공)다. 참으로 나에게 있어서는 진실한 신하요 너에게 있어서는 충신이다’라고 하시었다.”(278면)
실학군주 정조의 충신답게 채제공은 주자학에 정통하면서도 백성의 구체적인 생활상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황―정구―허목―이익’이라는 조선 유학의 계보를 마음에 둔 채로, 다른 한편 무명의 하층민들의 삶을 기록한 산문들을 남겼다. 채제공의 이 같은 실학자의 면모는 ‘경국제민(經國濟民)’으로 집약되어 그가 펼친 여러 정책들에 가미되었다. 서울에서 독점적 상행위를 단속한 ‘신해통공’과 신도시 화성 건설 계획이 대표적 사례다. 이 개혁 조치가 실행된다면 “주민은 자연히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길 터이고, 다른 지방의 사람들도 반드시 불러들이지 않아도 필시 제 발로 찾아오게 될 것”(328면)이라는 전망은 새로운 시대를 꿈꿨던 개혁군주와 신진사대부들의 열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왕도정치를 현실화하고자 한 정치가이자 사상가, 그들의 삶과 꿈
조선은 유학을 숭상한 왕조국가로서, 유성룡·이항복·김육·채제공은 어려서부터 유학 공부에 충실하고 자신이 배운 민본 사상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현실 정치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교를 위시한 절대왕정이라는 체제의 한계는 그들의 실천에도 영향을 미쳐, 김육의 대동법이나 채제공의 신해통공은 근본적 개혁조치라기보다 당시 체제를 보수·유지하는 차원에 그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 네 명의 명재상들은 당대의 여러 위기에 맞서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이 남달랐고, 그리하여 각 상황에 맞는 전략적 사고를 펼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의 우리가 조선조 명재상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