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의 「허생전」
시간의 주름, 그 너머로 던져진 매화(梅花) - 오늘 아침, 잊고 있던 책장 한 귀퉁이에서 채만식의 「허생전」을 발견했다. 책등이 닳은 흔적이 누군가의 지문처럼 선명해서, 문득 이 책이 얼마나 많은 손을 거쳐 왔는지 상상했다. 아마도 채만식도, 그리고 그가 다시 쓴 허생도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의 손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가 .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를 살아간 작가다. 전북 옥구 출신의 그는 마치 우리 문학사의 교차로에 서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풍자와 해학,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식민지 현실과 해방 후의 혼란이 그의 작품 세계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다. 「태평천하」,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등의 작품을 통해 당대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포착했던 작가. 그가 1946년에 발표한 「허생전」은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고전 「열하일기」 중 '허생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
이상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어떤 푸른 빛을 본다. 아마도 그것은 한여름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색, 또는 높은 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깊은 계곡의 물빛 같은 것일 테다. 채만식의 문장이 가진 투명함과 냉철함이 그런 색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
*** 「허생전」은 단순한 현대적 재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시간의 주름을 가로지르는 대화와도 같다. 조선 후기의 허생이 해방 직후의 조선으로 건너와, 다시 한번 자신의 실험을 시도하는 형식이다. 원작에서 허생이 양반 신분으로 상업 활동을 통해 큰 부를 쌓았다면, 채만식의 허생은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에서 투기와 밀매로 재산을 모은다 .
채만식은 이 작품을 통해 묻는다. "해방은 되었지만, 정말 우리는 해방되었는가?" 식민지에서 벗어났으나 여전히 불평등과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 그 속에서 개인의 윤리적 선택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허생이라는 고전 속 인물을 현대로 소환함으로써, 채만식은 역사의 연속성과 단절 사이의 긴장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허생이 모은 막대한 부를 버리고 떠나는 장면이다 .
"선생이 자리를 차고 일어서서 대문간으로 가더니, 뜰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초록 물 묻은 듯한 하늘에는 댕기처럼 가느다란 구름이 한 줄기 있을 뿐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또는 오랜 꿈에서 깨어난 듯한 가벼움. 허생의 이 선택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암시한다. 채만식은 이를 통해 물질적 성공이 아닌 다른 가치의 가능성을 조용히 제시한다 .
*** 채만식의 삶은 그의 문학만큼이나 복잡하고 아이러니했다. 1902년 전라북도 옥구(현 군산시)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었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근대적 사상과 문학을 접했다. 1924년 귀국 후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고뇌와 민족의 현실을 날카롭게 그려냈다 .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30년대 후반에는 창작 활동을 거의 중단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복잡한 입장에 놓였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그해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그의 생애는 허생의 삶과 묘하게 겹쳐진다. 세상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지식인, 그러나 세상의 부조리를 완전히 초월하지도, 완전히 순응하지도 못하는 딜레마 .
*** 나는 종종 생각한다. 만약 채만식이 오늘날 살아있다면, 그는 어떤 「허생전」을 쓸까? 21세기의 허생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스타트업 창업자가 되어 가상화폐로 부를 쌓고, 주식시장에서 투기를 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모습이지 않을까? 또는 유튜브 스타가 되어 디지털 세계에서 명성을 얻다가, 갑자기 모든 채널을 폐쇄하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일까? 채만식의 「허생전」이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고전의 현대화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 여러분도 잠시 책장에서 채만식의 「허생전」을 꺼내어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자문해보자. 나의 삶에서 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버림으로써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햇살이 비치는 오후, 나는 「허생전」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허생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는 그 장면. 그 빈 자리가 어쩐지 가장 충만한 순간처럼 느껴진다. 마치 매화나무 아래 쌓인 눈이 녹은 자리에 피어난 첫 봄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