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이동건축」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세계의 감각과 시간의 뒤편을 노래해 온 시인 박주택의 신작 시집. 〈현대시작품상〉 〈경희문학상〉을 수상한 전작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을 발간한 지 5년만에 출간한 『시간의 동공』에는 〈제20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시간의 동공」을 포함 총 4부, 69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박주택 시의 아름다움은 광기와 수치로 점철된 생을 고백하고 이를 정화해나가는 광경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잘못된 생의 회개와 정화는 치욕의 극단으로부터의 회복인 동시에 불행을 불행으로 보듬어 ‘자아’의 변화이다. 이로써 얻어낸 참된 생은 가지 않은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다. 폐허의 삶으로부터 구조한 존재의 의미가 비로소 ‘내’ 안에 깃들기 시작한다. 독자들은 이면(裏面)의 눈을 가진 시인의 숙명적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정화해내는 이번 시집을 통해, 광기와 수치로 점철된, ‘생’이라는 폐허의 현장에 숨어 있는 빛나는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이면을 알아보는 눈동자
진실로부터 진심으로 찾아낸 감찬(感愴)한 노래, 들
“시인은 순백한 영혼을 닦으며 추격해오는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그것을 옮겨 적는다.”_『시간의 동공』 뒤표지 글에서
‘절대음감’이라는 것이 있다. 음(音)과 음(音) 사이를 별다른 식별 없이 알아내는 능력을 일컫는다. 혹자는 ‘재능’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노력’이라고 하는 이 능력으로 음(音)의 비밀을 찾아내어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을 우리는 ‘음악가’라 부른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교육자로, 평론가로,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그러나 시인이다. 그렇기에 그는 보통과는 다른 ‘전력의 감각’으로, 생의 비밀을 응시하고, 여기 있으나 모르고 있는 ‘진실의 진심’을 밝혀낸다. 모든 감각으로 적어 내려간 이것이 ‘시’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시인의 조건을 혹시 ‘절대감각’이라 이를 수 있다면, 시인 박주택은 탁월한 ‘절대감각’의 시인이다.
박주택의 신작 시집 『시간의 동공』은, 그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시감각’(視感覺)에서 출발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집 곳곳에 ‘눈[目]’이 나오고, 이 ‘눈들’ 은 모든 방향을 바라본다. 이 ‘바라봄’에 시인은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 시인 박주택의 눈은 듣고, 맡고, 맛보고, 매만지며 이따금 시간의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꿈을 꾸기도 한다. 시각이 ‘시간의 전(全) 감각’이 되는 일, 박주택의 새 시집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문을 닫은 지 오랜 상점 본다
자정 지나 인적 뜸할 때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형
한때는 옷을 걸치고 있기도 했으리라 ─『폐점』 부분
시집의 첫 시 「폐점」에서 시인은 “문 닫은 지 오”래인 상점을 바라본다. 어둠과 마네킹이 망가져 있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순간, “불현듯 귀기(鬼氣)가 서려오고/등에 서늘함이 밀려오”(『폐점』)자 시인의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억으로부터 시간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곳을 처음 열 때의 여자를 기억한다
창을 닦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
옷을 걸개에 거느라 허리춤이 드러나 있었다
아이도 있었고 커피 잔도 있었다 ─『폐점』 부분
여기서 시간은 순식간에 진공 상태로 돌입하였다가 재조립되어 다시 흐른다. 앞 부분과 달리 이곳에는 ‘물을 뿌리는 여주인’과 ‘멀쩡한 마네킹’과 ‘아이’와 ‘커피 잔’이 있다. 눈부신 일상의 오전이 그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앞’과 ‘뒤’는 같은 공간이다. 단지, 그곳에 시간의 흐름이 놓여 있을 뿐. 시간의 앞뒤 관계는 필요 없다. 뒤가 앞을 낳고, 앞이 뒤를 앞지르는 순간 한 편의 시가 탄생한다. ‘기억해내기’를 넘어 과거의 것을 제자리에 가져다놓기. 이를 통해 독자들은 하나하나를 볼 뿐 아니라, ‘지금’은 없는 온기를, 소리를, 촉감을 느낀다.
동시에 이는 “선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같은 시의 마지막에 “어느 먼 기억들이 사는 집이 그럴 것이”며 “어느 일생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이 ‘그럴 것’이라는 미래 체험에 대한 진술은 행간의 과감함을 넘어서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시간의 모든 결이 이처럼 뒤섞여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박주택의 시들은 시간마저 물화(物化)하며 생을 관찰한다. 시간 속에 들어 있을 때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을 ‘바깥’에선 ‘볼’ 수 있다. 이 ‘횡’적인 몽환적 구조를 기반으로, 눈이 내리는 거리에서 일생의 수치를 고백하거나 (「저녁 눈」) 부모님과 함께 왕릉에 가서 과거의 부모님을 조우하는(「헌인릉에 가서」) 등의 시들이 쓰인다.
이러한 박주택의 시적 행보는 지난 시집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의 시간과의 대결과 화해라는 주제로부터의 진일보라고 할 수 있다. 그 변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공간에 대한 ‘종’적 움직임이다.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말 한 마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
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
꽃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없는
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
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
받아들이는 발자국, 가는 핏줄 속으로 잦아드는
금잔화, 생이 길쭉길쭉하게 자라 있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시간의 동공」 부분
만리포 바다 앞에서 시인은 꿈을 보고 있다. “꽃들이 혁대”를 내질러 “바람의 등을 후”려치고 파도의 흰 거품이 한 마리 말이 되어 내달리는 꿈. 그 위에는 별이 떠 있고 새들은 날개를 쉰다. 마치 샤갈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이 시에서 우리는 꿈/현실―현실/꿈의 경계를 한눈에 집어넣으며 그 환상적 달아삿름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몽환의 시간의 교차에서 오는 어지러움과는 다르다. 착시는 더더욱 아니다. 이 ‘환상적 현상’은 공간 특유의 단단함을 내포한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만리포 앞 바다에서 달려오는 흰말과 그 말발굽 소리를 ‘볼’ 수 있다. ‘시간의 동공’을 통하여, 몽환적 시간 위에 쌓여 올라가는 환상적 현상. 박주택의 시집 『시간의 동공』의 종적 운동은 이렇게 완성된다.
이러한 종횡의 운동을 통해 박주택은, 삶을 정화해나간다. 부당함을 폭로하고 잘못된 생애를 고백하면서 불안을 불안으로 불행을 불행으로 끌어안고 모든 것으로부터 깨끗해진다. 이는 화해가 아니다. 화해는 서로 다른 것들의 존거함을 그 전제로 한다. 이와 같이 박주택은 하나의 생을 오롯하게 하나로, 더 나은 하나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시집의 핵심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정과리(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박주택 시의 아름다움이 이 정화의 광경에 있음에 주목한다. 해설에 따르면, 이 시집은 “ ‘불행’의 계약에 수결한 ‘불행한 자(시인)’ ”의 것이며, 이 ‘불행한 자(시인)’는 약속된 ‘불행’ 속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그 뛰어듬, 즉 “ ‘불행’을 노래”하고 ‘불행’을 말하는 것은 “ ‘불행’을 이겨내기 위해서이지 즐기기 위함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시집 안에선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움직임을 따라 생의 이면을 바라보는 시의 동공(시인의 동공)은 사실 “공동(空洞)”임을 지적하면서, 이 비어 있음은 “맹목적 다수성의 존재들이 실은 스스로 눈빛을 빛내는 존재들”임을, 그 존재들이 구성하는 이 세계가 폐허의 삶으로부터 구제한 것임을 깨닫는 자리임을 밝힌다.
박주택은 시를 온몸으로 받아내 적는 시인이다. 시를 쓰기 위한 감각은 그런 것이다. 숨조차 쉬기 어려운, 수치로 점철된 생을 고백하는 일. 그리고 그 고백 위에 탈 시공간의 아름다움을 세우는 일. 시인은 말한다. 시인이란 “순백한 영혼을 닦으며 추격해오는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 그것을 옮겨 적는” 자. 그렇다면, 시란 “순백한 영혼을 닦으며 추격해오는 고통”과 진배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은 단 하나의 희망으로 견딜 수 있다. 그 희망을 무어라 부르겠는가. 참된 생은 가지 않은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다. 이곳의 의미를 분해 재조립하며 읽어낼 때 우리의 삶에 가치가 부여된다. 이것이 박주택이 이번 시집을 통해 보려주려는 단 하나이자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