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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속의 사나이>에는 1884~1903년에 발표된 체호프의 중단편 중에서 13편을 엄선해 연도순으로 수록했다. 곤경에 처한 불우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는 <굴> <아뉴타> <반카> 등의 초기작은 물론, 더욱 무르익은 기량으로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녹여낸 <6호실> <로트실트의 바이올린>등의 중기작, 대표적인 걸작으로 회자되는 <귀염둥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등의 말기작,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으로 발표한 단편 <약혼녀>까지. 체호프의 단편들을 읽다 보면,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감정을 누구보다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그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무지해서라기보다는, 사랑이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랑이 가져올 파장까지 함께 이해하고 있기에,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고통을 견디는 쪽을 선택한다. 다만 그의 마지막 작품 <약혼녀>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담대함, 이전에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던 희망을 향해 움직이는 여성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체호프의 이런 시선은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파산으로 가족 전체가 빈곤에 내몰리는 경험을 했고,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후 의사가 된 그는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쉽게 삶의 조건 속에 묶일 수 있는지를 목격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삶을 낭만적으로 미화하는 태도 대신, 그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이 배어 있다. 특히 여성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런 특징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안나는 자신의 결혼이 공허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구로프와의 사랑이 자신의 삶을 근본부터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히 자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랑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보다는, 그 감정이 가져온 고통을 끌어안은 채 다시 자신의 현실 속으로 돌아간다. <사랑에 대하여>의 안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알료힌과 서로 사랑하지만, 그 감정을 끝내 삶으로 옮기지 않는다. 그것은 용기가 없어서라기보다, 그 선택이 자신과 타인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릴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귀여운 여인>의 올렌카는 또 다른 방식으로 체호프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데, 그 모습은 한편으로는 안타깝지만, 동시에 사랑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여성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어렴풋이 혹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 인식은 삶을 바꾸는 힘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약혼녀>의 나디아는 이전의 체호프 작품 속 여성들과는 분명히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약혼과 결혼으로 이어질 예정된 삶이 자신을 질식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그 삶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 선택이 무엇을 가져올지는 분명하지 않다.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어쩌면 더 힘든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떠난다. 더 나은 삶을 확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삶에 머무르는 것이 더 이상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체호프의 이전 작품 속 여성들이 삶을 인식하는 데서 멈추었다면, 나디아는 그 인식을 따라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이 체호프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나디아의 떠남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평생 머무르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왔던 작가가 마지막에 이르러 떠나는 인물을 남겼다는 사실은, 삶이 바뀐 이후를 말하기보다 바뀌기 시작하는 순간 자체를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떤 희망을 확신하는 결말이라기보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자각 앞에서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하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생의 끝자락에서 체호프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삶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_______ ‘안녕, 정다운 사샤!’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나자, 그녀 앞에 새롭고 광활한 삶이 떠올랐다. 아직 선명하지 않은, 비밀로 가득한 그 새로운 삶은 손짓하며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아침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그녀는 생기와 기쁨으로 가득한 채 고향을 떠났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상자 속의 사나이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박현섭 저 #상자속의사나이 #안톤파블로비치체호프 #문학동네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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