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여자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죠?”
상상과 현실의 세계를 유영하는 장르 거장의 사색기
휴고 상, 네뷸러 상, 로커스 상 등 최고 권위의 장르문학상을 여러 차례 석권하고, 미국 문단에 끼친 공로로 전미 도서상 메달을 수여받기도 했던 어슐러 르 귄의 『세상 끝에서 춤추다』가 출간되었다. 르 귄이 예순의 나이를 목전에 두었던 1989년에 출간된 이 책에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전반에 걸쳐 발표했던 강연용 원고, 에세이, 서평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듬해 휴고 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서평을 제외한 각각의 글은 주제에 따라 여성, 세계, 문학, 여행을 나타내는 네 가지 기호가 붙어 있는데, 서문에서는 그 의도를 “특정 경향에 동조하지 않는 독자들이 피해 가는 데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무엇이든 주는 대로 받으려는 독자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위트 있게 밝히고 있다. 잔잔한 유머와 날카로운 분노가 곁들여진 폭넓은 주제의 글들은 소설만으로는 미처 알지 못했던 르 귄 특유의 철학과 세계에 좀 더 다가갈 수 있게 하고,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거듭나던 시기의 사유 과정을 보여 준다. 르 귄이 자신의 대표작인 어스시 연대기를 마법사 게드가 활약하는 3부작에서 완결하지 않고, 20년 만에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 장편 『테하누』(1990)로 다시 이어지게 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 자각의 기록이기도 하다.
"르 귄의 너르고 장난기 넘치는 마음속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리고 충실하고 우아한 산문을 읽는 것 역시 기쁜 일이다." -에리카 종(『비행공포』의 작가)
언어, 여자, 장소에 관한 르 귄의 문장들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폐경, 유토피아, 여행기, 『하늘의 물레』 공청회를 둘러싼 문학의 검열 문제, 「스타워즈」에 관한 감상 등 밀접한 삶의 단면에서부터 SF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소재를 망라한다. 때로는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난해하고 추상적인 주제 속에서도 설득력 넘치고 우아한 문장들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르 귄의 사고실험에 동참하게 한다. 여성 교육의 산실이었던 밀스 컬리지 졸업생들을 위해 했던 「왼손잡이를 위한 졸업식 연설」은 역대 미국 명사들의 명연설을 모은 사이트 아메리칸 레토릭(www.americanrhetoric.com)에서 최고의 연설 100선에 꼽히기도 했다.
“몸이 폐경처럼 강렬한 변화 신호를 주는데도 변하지 않고 젊게 남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분명 용감하다. 하지만 어리석기도 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노력이다.”(「우주 노파」)
“나는 SF의 핵심 기능 하나가 바로 이런 종류의 질문 던지기라고 생각한다.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뒤집고, 우리의 언어에 아직 가리킬 말이 없는 것을 은유하고, 상상으로 실험하기.”(「젠더가 필요한가? 다시 쓰기」)
“현재는 압도적인 현실의 무게로 이야기와 맞설 뿐 아니라, 이야기를 시곗바늘이나 심장 박동의 속도에 한정해 버린다. 서사는 과거라는 “다른 나라”에 스스로를 위치시켜야만, 그곳의 미래인 현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서사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저는 갈수록 글쓰기 행위 자체가 번역이라고, 적어도 다른 것보다는 번역에 가깝다고 느끼게 됐어요. 그러면 원본은, 원래의 텍스트는 뭐냐고요? 제게는 답이 없어요. 아마 아이디어들이 헤엄치는 깊은 바다 같은 원천이 원본이고, 작가는 말이라는 그물로 그 아이디어를 잡아서 반짝이는 모습 그대로 배에 던져 넣는 거겠죠…….”(「산문과 시의 상호 관계」)
“인류를 위해 기차를 살리자.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어디에 가는지 못지않게 어떻게 가는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을 위해서.”(「1430호차, 9호실」)
르 귄과 함께 기억해야 할 이름, 시어도라
사고실험을 통해서 다른 환경에 살아가는 인물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깊이 있게 다루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방식은 르 귄의 탁월한 강점이며, 여기에 뛰어난 인류학자였던 아버지 앨프리드 크로버의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에는 남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가려져 있던 어머니 시어도라에 대한 기억을 볼 수 있는 글이 두 편 수록되어 있다.(「시어도라」, 「여자 어부의 딸」) 최후의 아메리칸 원주민이었던 이시에 대한 기록을 앨프리드와 함께 남긴 지적 동반자이자 스스로도 훌륭한 작가였던 시어도라는 여성 해방 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표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늦게 글쓰기를 시작한 것을 후회하고 딸에게는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에 관해 쓰라고 권했던 인물로 기억되어 있다. 어머니의 삶을 반추하며 여성 예술가의 복합적인 삶에 대해 조명한 르 귄의 글은 이 책이 나온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큰 울림을 준다.
“어머니의 결혼 전 이름은 시어도라 크라코프였고, 첫 결혼 후에는 시어도라 브라운이었어요. 어머니가 책을 쓸 때 쓴 이름은 두 번째 결혼하고 얻은 이름 시어도라 크로버였죠. 세 번째 결혼 후의 이름은 시어도라 퀸이었어요. 이렇게 여러 이름을 갖는 일은 남자에게는 일어나지 않죠. 불편하지만, 그 성가신 현상 자체가 여자 작가란 ‘저자’라는 단순한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책임을 갖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글쓰기인 다중적이고 복잡한 존재 과정이라는 점을 밝혀 주는지도 몰라요.”(「여자 어부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