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가 바로 김민부다. 10여 년에 걸친 짧은 시작(詩作) 기간과, 남겨진 총 61편의 작품은, 31세로 마감한 그의 짧은 생애처럼 어느덧 쉽게 세상에서 잊혀 버렸다. 작품들은 시인이 마주하는 어둡고 창백한 일상, 거기에서 일어나는 우울하고 피폐한 시인의 심상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시들로 그가 추구했던 순수성과 정직성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균열, 그 틈에 비운으로 떠돌다 간 시인
이른 등단으로 화려한 조명과 관심을 받았던 김민부는 고등학교 생활을 마친 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한다. 이후 동국대 국문과에 편입해 졸업한 뒤, 별세 전까지 계속해서 MBC, DBS, TBC 등의 방송국에서 PD와 작가로 근무하며 생업을 이어 나가기 바쁜 일상들을 보낸다. 게다가 그는 매일 상당량의 방송용 원고를 써 내려가야 하는 과중한 부담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일찌감치 결혼해 가정을 꾸린 그는 상경 후,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처가의 식구들까지 일곱 명의 식솔을 혼자 도맡아 벌어 먹여야 했기에 가장으로서의 그의 고충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고등학생 시절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시집 ≪항아리≫ 후기에서 그는 “산문적인 요소와 감각적인 경험 세계를 배제함으로써 순백한 경지에서 감동의 미를 추구하는 것이 나의 시정신”이라고 확고한 시론을 밝혔던 바, “순수한 시 세계의 경지에서 우러나는 감동의 미를 추구”하고자 했던 그의 “순백한” 시심과 문학적 자존심은, 생계를 위해 불가피했던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방송 원고 더미에 못 이긴 채, 수없이 꺾이고 훼손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그는 극심한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고, 결국 강박처럼 따라다니던 우울감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가 31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화마(火魔)에 휩쓸려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모를 죽음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생업에 바빠 창작에 소원해졌던 그가, 시집 ≪항아리≫를 내고 10년 만에 38편의 시가 담긴 ≪나부와 새≫를 간행한다. 앞서 말한 바 있지만, 그는 이 시집의 후기에서 “목숨을 줄이더라도 몇 편의 시를 쓰고픈 충동에 몸을 떨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가 시작(詩作)을 향한 절실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시를 오래 쓰지 못하고 외려 시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극심한 죽음 충동에만 지속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는 오래전부터 문학적으로는 이미 가사(假死) 상태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의 유고 시집이 된 ≪나부와 새≫에는 유독 저승, 화장(火葬), 상여 등 죽음과 관련된 어두운 정조의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살아 있지만 ‘죽어 버린’ 새의 이미지는 시집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시집에 수록된 총 38편의 작품 중에 18편의 계절적 배경이 가을이며 15편의 시에서 새가 중심 소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에서 “가을”이나 “새”는 죽음과 연관된다. 특히 새의 경우 화자에게 죽음을 암시하는 존재로서 현현하거나, 혹은 이미 ‘죽어 버린 새’ 역시 화자와 동일시되어 우울하고 피폐한 시인의 심상 드러내고 있다. <구름>이라는 시에서 화자에게 “새가 물어다 주는 종이 한 장”에는 죽음을 암시하는 점괘가 들어 있다. 또한 “새가 울면 나부의 손이 떨어진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새는 죽음을 몰고 오는 사자(死者)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구름>이라는 시에서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화자 역시 새점을 쳐 주는 여인의 얼굴에서 그녀에게 다가올 죽음을 이미 읽고 있다는 것이다. 길바닥에서 “싸리 조롱을 놓고” 새점을 치는 여인의 얼굴이 화자의 눈에는 머지않아 “죽을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그의 시에서 ‘새’는 “찻잔 속에/ 남은 죽음을/ 핥”(<새>)고 있거나, “날개에 불을 적신 채, 잿빛 하늘로/ 날아”(<엽서(葉書) Ⅰ>)가거나, “황혼을 빨아들이”(<단장 Ⅱ>)거나, “꽃상여가 밀리듯/ 저승을 건너가는 저 짐승 떼”(<기러기>) 등의 어두운 이미지, 죽음의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다.
시집 ≪나부와 새≫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은 죽음의 분위기로 일관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연인으로서의 ‘너’ 역시 죽음을 전제로 할 경우에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작품 <별리 Ⅱ>에서 보이듯, 반쯤 죽은 여자인 ‘너’와 반쯤 죽은 남자인 ‘내’가 만날 때, 만남과 죽음은 비로소 온전한 합일 지점에 이른다. <아가 Ⅱ>에서도 ‘나’와 ‘너’가 “우리의 첫 신방”에서 만나는 것 역시 죽음 후에나 가능하다. 이처럼 시인에게 삶 자체는 이별과 죽음으로 온통 점철되어 있으며, 대상과의 화해와 만남 또한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비친다. 그래서일까. 시인에게 죽음은 두렵고도 불가항력적이며 초월적인 세계임에는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살 충동과 우울증, 자학으로 인해 그가 이미 죽음에 주도적으로 다가서고 있음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기별(寄別)>이라는 작품에서도 화자 자신을 “쳐 죽이려고” 섬광으로 내리는 “마른번개”를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기별”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죽음을 거부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일상과도 같은 죽음의 공기 속에서 오히려 단 하나의 ‘기별’을 기다리며 살고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이처럼 그의 자의식은 “버리고 싶은 목숨과/ 살아 있는 나날의/ 이 끓는 진공”(<추일(秋日)>)의 틈 속, 그 “균열의 간격”(<나부와 새>)과 간극 사이를 끊임없이 드나들며, 괴로움과 희열을 동시에 혹은 교차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 쓰기에 대한 지나친 결백증과 시 쓰기가 구원이 되지 못한 현실 바로 그 지점에 그의 요절에 대한 의미가 있다고 김준오가 지적한 바 있다. 오히려 그는 목숨과 맞바꾼 몇 편의 시를 통해 궁핍하지만 풍요한, 가장 순수한 자기 구원에 이른 것은 아닐까 한다.
책 속으로
나는 때때로 죽음과 遭遇한다
凋落한 가랑잎
여자의 손톱에 빛나는 햇살
찻집의 鳥籠 속에 갇혀 있는 새의 눈망울
그 눈망울 속에 얽혀 있는 가느디가는 핏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창문에 퍼덕이는 빨래…
죽음은 그렇게 내게로 온다
어떤 날은 숨 쉴 때마다 괴로웠다
죽음은 내 靈魂에 때를 묻히고 간다
그래서 내 靈魂은 늘 淨潔하지 않다
<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