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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쉽지 않은 소설이라 읽는 데에도, 또 독서후기의 방향을 잡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외부로 드러나 있는 인물들을 먼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시인 존 셰이드는 이 작품의 중심에 놓인 999행의 시 <창백한 불꽃>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노시인으로, 삶과 죽음, 우연과 운명 같은 문제를 사유하는 시를 써 내려간다. 이 시의 중심에는 외로운 삶을 살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딸 헤이즐 셰이드의 죽음이 놓여 있다. 셰이드는 딸의 죽음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시를 완성한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이 시에 방대한 주석을 붙여 출판하려는 편집자 찰스 킨보트다. 그는 셰이드의 옆집에 살던 이웃이자 같은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로, 시가 완성되는 동안 셰이드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킨보트는 자신이 북방 왕국 젬블라에서 망명한 마지막 왕 카를 크사베리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가 미국까지 쫓아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셰이드가 완성한 시에는 젬블라라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암살자로 묘사되는 야코프 그라두스다. 킨보트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젬블라 왕을 제거하기 위해 먼 나라에서 미국까지 쫓아온 인물이다. 그러나 이 암살자의 존재 역시 킨보트의 이야기 속에서만 전해지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이 실제 사건인지 확신할 수 없다. 킨보트는 셰이드가 자신이 떠나온 조국에 대한 시를 써주기를 기대했지만, 시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완성되자 크게 실망한다. 그러나 셰이드가 갑작스러운 총격으로 죽자 상황은 달라진다. 킨보트는 시에 주석을 붙여 출판하겠다는 조건으로 원고를 손에 넣고, 그 주석 속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음껏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를 설명한다는 명목으로 붙은 주석은 점점 원래의 시와 멀어지고, 결국 편집자인 킨보트 자신의 이야기로 변해간다. 나보코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 이 소설 역시 해석이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검색해 보니 ‘이 모든 해프닝의 설계자는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시인 존 셰이드일지도 모른다’는 흥미로운 추측도 있었다. 셰이드의 시 곳곳에 등장하는 우연과 패턴, 그리고 시가 완성되는 순간 벌어진 사건들이 묘하게 맞물린다는 점 때문에 나온 해석이다. 어쩌면 이러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 자체가 바로 이 작품의 의도인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언제나 문학이 단순한 이야기 전달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믿었던 작가였다. <창백한 불꽃>은 한 편의 시와 그 주석이라는 형식을 통해 텍스트와 해석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며, 문학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세계가 될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나보코프를 향한 팬심으로 끝까지 이해해 보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읽어냈다. 다 읽고 나니 무엇보다 그 점이 가장 뿌듯하다. 내가 조금 대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__________ 이 말을 듣고 그가 랭턴 씨에게 했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집안이 좋은 어떤 젊은 신사의 비루한 신세에 대한 이야기였다. “선생, 내가 그에 대해 마지막으로 들은 얘기는 그가 고양이들을 쏘며 마을을 뛰어다닌다는 것이었소.” 그러고는 이런저런 잔잔한 상념에 빠져 있다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고양이를 떠올리더니 말했다. “하지만 호지는 총에 맞으면 안 돼. 안 되지, 안 돼. 호지가 총에 맞게 둘 순 없어.” ─제임스 보즈웰, 『새뮤얼 존슨전傳』 창백한 불꽃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김윤하 저 #창백한불꽃 #블라디미르나보코프 #문학동네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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