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파가 사라짐으로써 완전히 종단이 해체되는 과정을 겪었음에도 불교가 아직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조선 전기의 선승 허응보우(虛應普雨)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보우 스님의 시문집인 ≪허응당집≫을 편역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 중 보우 스님의 선시가 갖는 취향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들로 97편을 선별하였다. 당시 불교계를 양 어깨에 짊어진 채 무수한 화살을 피해가던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의 결을 시문 속에 담아냈다. 스님은 논리적인 교리 문답이나 유가 선비들과의 논쟁은 물론 시를 통해서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거나 제자들을 위한 권계에 능란했던 탁월한 시승이었다.
스님의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이고, 보우는 법명이다. 가계 등은 미상이며,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長安寺)·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련을 쌓고 학문을 닦았다. 그 뒤 탁월한 수행력과 불교·유교에 관한 뛰어난 지식을 바탕으로 유명한 유학자들과도 깊이 사귀었다. 그 중에서도 재상이었던 정만종(鄭萬鍾)과는 특별한 사귐이 있었다. 정만종이 보우의 인품과 그 도량이 큼을 조정과 문정대비(文定大妃)에게 알리게 됨에 따라, 뒷날 문정대비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548년(명종 3) 12월, 스님은 문정대비로부터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임명받게 되었다.
이후 스님은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사찰을 보호하는 한편, 1551년 5월 선종과 교종을 다시 복구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또한 1552년 4월, 승려 과거시험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1504년(연산군 10)에 폐지되었던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부활시켰다. 선교 양종과 승과제도가 부활됨으로써 승려들의 자질이 향상되었음은 물론 휴정(休靜)·유정(惟政) 등과 같은 고승들이 발탁되기도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은 선교 양종과 도첩제·승과제의 폐지를 요구하고, 보우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다. 그리하여 승정원·홍문관·예문관·사헌부 등에서 매일 번갈아 상소를 하였고, 좌의정이 백관을 인솔하여 계(啓)를 올리는가 하면 성균관 학생들은 모두 종묘에 고(告)하고 성균관을 비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비호 아래 각종 제도적 장치가 완비됨으로써 불교계는 완연히 회복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보우 스님은 판사직과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의 청평사(淸平寺)로 돌아가 자기 수양에 침잠하였다. 이후 몇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아 교단의 일을 맡았으나, 결국 문정대비의 죽음 이후 서슬 퍼런 유학자들의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이(李珥)가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린 것을 비롯하여 전국의 유생들은 물론 정승들까지 보우를 죽일 것을 건의하였다. 이후 보우 스님은 1565년 6월 12일에서 7월 28일 사이에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보우는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창하여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았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이 책은 보우 스님의 시문집인 ≪허응당집≫을 편역한 것이다. 스님의 저술로 여러 책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허응당집≫ 상·하 2권에는 주로 시를 수록하였고, ≪나암잡저≫에는 문을 수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나암잡저≫를 한데 묶어 총 3권본 ≪허응당집≫이라 하기도 한다. ≪허응당집≫은 1959년 일본 천리대학아야사토연구소(天理大學あやさと硏究所)에서 간행한 영인본이 현재 널리 유통되고 있다. 권두에는 제자 태균(太均)이 쓴 편차(編次)가 있고, 하권 끝에는 1573년(선조 6) 이환(離幻)이 쓴 발문이 있다. 상권에는 오언과 칠언의 절구와 칠언율시·게송 등이 247수, 하권에는 376수가 수록되어 있다. 600여 수가 넘는 양으로 조선조 시승의 작품 수로는 비교적 많은 부류에 속한다. 이 책에서는 이 중 보우 스님의 선시가 갖는 취향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들로 97편을 선별하였다.
조선조 승려 중 보우 스님만큼 불명예를 안고 산 분도 드물 것이다. 요승이니 괴승이니, 문정왕후와 부적절한 관계이니 하는 수많은 모함들은 역설적으로 보우 스님의 법력을 반증하는 예라 하겠다. ≪허응당집≫을 보면, 스님이 시승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가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