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아는 책 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발아한다.”
지식 습득을 위한 책 읽기를 넘어,
삶의 확장을 위한 인문학적 책 읽기
시인, 소설가, 문학비평가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글쓰기 활동을 해 온 작가 장석주의 [일상의 인문학]이 민음사에서 출간됐다. 생애 전체를 독서인으로 살아오기도 한 저자는 그간 "밥을 먹듯, 또한 노동을 하듯" 읽은 책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해마다 1000여 권의 책을 사들이고 그것들을 매일매일 읽는 것을 생의 큰 보람과 기쁨으로 여기는 저자는 독서란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책 읽기의 최종 목적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유를 하는 것. 즉 책 읽기를 통해 지식의 전체상에 접근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식을 ‘통섭’할 수 있는 사유의 총량을 키워야 한다. 진정한 독서인은 책을 바탕으로 책을 가로질러 책 너머로 나아간다.
이 책에는 기다림, 망각, 타인, 사랑, 죽음, 소비, 여행, 일, 정치, 문학, 자유 등 50여 가지 주제가 300여 권의 책 읽기 통해 사유되고 있다. 인문학과 책 읽기는 우리의 삶, 일상과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일상 속 다양한 주제들을 사유하고, 다시 그것들이 어떻게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드높이고 메마른 삶을 윤택하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궁리한다.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삶을 확장하고 타인의 삶을 보듬는 인문학적 책 읽기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다독가, 장서가로도 잘 알려진 장석주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정오까지 글을 쓰고 오후에는 책을 읽고 사색한다. 십여 년 전 경기도 안성에 서재 ‘수졸재’를 지어 3만여 권의 책을 보관하고 해마다 1000여 권의 책을 사들인다. 시와 소설은 물론 에세이, 인문서, 역사서, 예술서, 과학서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두루 섭렵하는데, 그의 말처럼 그는 "책을 읽는 일에서 밥을 구하고 지혜를 구한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이 곧 일상이자 일인 그에게 독서는 시간이 남아돌 때 한가롭게 빈둥거리며 하는 취미 활동이 아니다. 그는 매일 세끼를 먹듯 책을 읽는다.
[일상의 인문학]은 저자가 이처럼 "살기 위해, 또한 죽지 않기 위해" 읽어 온 책들에 관한 기록이다. 기다림, 망각, 타인, 결혼, 사랑, 불륜, 외로움, 미국, 죽음, 소비, 통섭, 정치, 노동, 악, 자연, 취향, 흡연, 여행, 돈, 시간, 자본주의, 탈현대, 생태주의, 문학, 자유, 죽음 등 50여 가지의 주제가 300여 권의 독서 기록과 함께 사유된다.
저자가 책에서 구하는 것은 지적 충일감을 넘어선 인식의 확장, 삶의 확장,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타자와의 소통이다. 삶과 세계 속에서 이런 주제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사유하고, "다시 그것들이 어떻게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드높이고 메마른 삶을 윤택하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궁리한다." 독서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이 행위를 통해 저자는 "지식과 정보들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상호 모순으로 충돌하는 의견과 제안 사이에서, 혹은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다른 넘치는 지식과 정보에 섞여 숨어 버린 상태에서 껍질이 아니라 ‘진리의 낟알’을 찾고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나쁜 정치에 저항하라고 외친다. 또한 우리의 삶을 쓰레기로 만드는 모든 악덕들, 자본과 자원의 독점, 집단의 광기, 유전자 변형, 불공정 무역 등에 저항하고, 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애쓰라고 독려한다.
"현실이 던적스럽고 갈 길이 흐릿할수록 인문학은 필요하다."
날마다 책을 읽으며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사유의 길을 찾다
흔히 지적되듯 IMF 체제 이후 극대화된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는 우리의 삶의 풍경을 바꿔 놓았다. 물질이 최고의 가치이자 덕목이 된 사회에서 돈이 되지 않는 일은 철저히 소외됐다. 대학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교수들도 업적 지상주의 흐름 속으로 내몰리고, 학생들도 돈이 되는 전공과목에 몰리면서 순수 학문 영역은 외면되어 왔다. 또한 하루에도 수십 건씩 듣게 되는 폭력 및 살인 사건, 정치권의 부정부패, 장기 불황, 청년 실업, 이혼 및 자살 증가, 양극화 등 사회 구조적 모순과 상대적 박탈감은 사람들을 우울에 빠트리고 증오의 문화, 위험 사회를 만들어 간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자성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humanities)은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나온 말로, 사람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문학, 역사, 철학을 하나로 아우른다. 먹고사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등한시되어 왔지만, 최근 각종 기업에까지 불어닥친 ‘인문학 열풍’은 고달픈 삶의 돌파구를 인문학에서 찾으려는 시도로서 인문학이 우리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는 인식을 전제한 것이다. 현실의 고달픔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다운 삶,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등의 질문을 갖게 되고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학문,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학문인 인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지 돌아보고,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의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읽고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결혼 제도에 대해 새롭게 사유한다. 배수아와 한강의 소설을 통해서는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것을, 김훈의 소설을 통해서는 인간의 욕망과 피로에 대해 생각한다.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를 읽고 속도의 관성과 각방에 빠진 문명을 돌아보고,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을 읽고 역사의 아픔을 되새긴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읽고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우리 삶을 돌아보고 각성의 계기로 삼으며, [스콧 니어링 자서전]을 읽고서는 자연과 더불어 느리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사유한다.
니체의 말처럼 책은 내 안의 타성과 망각을 깨는 도끼다. 저자는 삶이 고단해지고 혼돈과 무질서가 심화될수록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책 속에서 사유의 길을 찾으려고 애썼다.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우리가 읽은 모든 책들이 우리 안에 살아서 우리를 의미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책 읽는 자들의 의무는 책 읽기를 통해 어떻게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드높이고 메마른 삶을 윤택하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