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41년, 한국 여성시의 정점
창조를 향한 시인의 은밀한 내면, 그 날카로운 관능
사랑과 설렘과 최초의 언어로 경이로운 이 세계를 노래하다
1969년 서정주,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문정희 시인은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 여성시를 이끌어 온 대표 시인이다. 섬세하고 힘 있는 ‘여성적 생명주의’ 시 세계를 구축하여 폭넓은 공감대를 일으킨 그녀의 시는 국경을 뛰어넘어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알바니아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2008년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등을 수상한 시인은 2004년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 문학 포럼에서 올해의 시인상을, 2010년 스웨덴 문학상인 시카다상을 받기도 했다.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로 문단과 독자 모두의 사랑을 받아 온 문정희 시인이 등단 41년 만에 열한 번째 시집 『다산의 처녀』를 출간했다. 그녀의 시는 여전히 건강하고 솔직하다. 기존의 여성시가 안고 있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자아를 거부하고, 문단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올곧게 밀고 온 그녀의 시 세계는 한 문학적 인생의 진경을 보여 준다.
이 시집에서 말하는 ‘처녀’는 여리고 나약한 존재가 아닌, 비옥한 자연의 몸을 간직한 다산의 생명을 상징하며,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여성을 상징한다. 그녀는 그 근원적 생명의 힘을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들려준다. 일상의 편린 속에서 번뜩이는 예술적 순간을 발견해 내는, 경쾌하고 발랄하지만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느껴지는 시어들로 우리의 영혼을 깨우며, 쓸쓸한 우리네 삶을 따뜻하게 끌어안아 준다.
■ 기쁨과 슬픔의 뼈에서 솟아난 눈물 같은 시어들
다산의 처녀, 하늘 아래 가장 깊은 문을 열다
문정희 시인은 “여류라는 온건한 울타리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자유의 충동 속에서 위반의 여성 신화를 만들어 냈다.”(문학평론가 엄경희) 그녀의 시는 기존의 여성시가 안고 있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자아를 거부한다. 이 시집에서 말하는 처녀는 우리의 통념 속에 자리한 여리고 나약한 존재가 아닌, 무서운 바다를 꿈꾸고 독이 든 열매를 따는 금단의 위반자이며 모험가이다. 사회의 일반적 규정이나 제도 등과 상관없이 여성 내부에 간직된 자유정신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즉 이 시집에서 ‘처녀’는 비옥한 자연의 몸을 간직한 다산의 생명을 상징하며,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여성을 상징한다.
붉은 물이 흐른다
더 이상은 벌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벌린 두 다리 사이
하늘 아래 가장 깊은 문을 연다
치욕 중의 치욕의 자태로
참혹한 죄인으로 죽음까지 당도한다
드디어 다산(多産) 처녀의 속살에서
소혹성 같은 한 울음이 태어난다
불덩이의 처음과 끝에서
대지모(大地母)의 살과 뼈에서
한 기적이 솟아난다
지상에 왔다가 감히 그 문을
벼락처럼 연 일이 있다
뽀얀 생명이 흐르는 부푼 젖꼭지를
언어의 입에다 쪽쪽 물려 준 적이 있다
―「물의 처녀」
문정희 시 세계에서 몸은 가장 중요한 테마 중 하나이다. 원시적 본능이자 태초의 아름다움이며 모든 허식으로부터 벗어난 순수로의 회귀이다. 이문재 시인이 “문정희의 시들은 내 속에,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그러나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는 ‘몸의 음악’이다.”라고 말했듯이, 그녀의 시는 존재의 시원으로서의 몸, 그 근원적 생명의 힘을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들려준다.
문정희 시인이 시 속에서 꾸준히 간직해 온 화두는 바로 ‘자유와 고독’이다. ‘지금-여기’를 벗어나는 것, 그 ‘낯섦’이 주는 불안은 타고난 모험가인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 시집에서 그녀는 “날마다 길을 떠나는 집시”처럼 멕시코, 인도, 터키, 마케도니아, 아바나, 뉴욕, 발리, 프라하, 하코네 등을 떠돈다. 여행은 그녀에게 자기 속에 갇히지 않으려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햇살 속에 바퀴가 있다
햇살이 있는 곳은 어디든 길이다
나는 그것을 인도에 와서 알았다
해골을 뜯어먹고 산 탓인지
까마귀들이 친인척처럼 달려들었다.
매캐한 연기와 연기(緣起)의 카오스를
심해어처럼 꿰어 다녔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오직 길을 잃는 일뿐이다
나는 홀로 유파(流派)이다
길 하나를 만들며 맨발로 걷고 또 걷는다
죽은 아내가 그리워 무굴의 왕이 지었다는
찬란한 보석 무덤을 향해 자무나 강가로 떠나는 날
나는 홀연 차에서 내렸다
이번 생이 아니라면 다음 생이라도
사랑하는 이를 만나면 그때 함께 가리라
내 몸에도 바퀴가 있으니
시공을 넘어 무한에 닿으리라
사랑이여, 그때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을 다만 모를 뿐이다
―「여행길」
문정희의 시는 난해하지 않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무게가 느껴지지만, 결코 무겁거나 슬프지 않으며, 오히려 경쾌하고 발랄하다. 삶의 부조리함과 모순, 존재의 아픔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드러내지만, 그의 시어들은 일상적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편안한 일상어들이다. 그러나 평범한 시어도 그녀의 입술이 닿는 순간 아름다운 시가 되어, 날카로운 죽비처럼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깨운다.
문정희 시인은 일상의 편린 속에서 번뜩이는 예술적 순간을 포착해 내며, 고유한 한국적 감성에 범세계적 보편성을 가미한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자다가 일어나 합세하여 모기를 잡고 남편의 턱에 바르고 남은 연고를 아내의 배에 바른 후에 함께 연고 바른 자리를 문지르며 그 달에 쓴 신용카드비를 계산하는 부부는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본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부부」)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숨죽여 홀로 운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못 볼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지금 뛰는 것을
당신께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을 말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그녀에게 해가 질 때는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르고 당신을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는 종말론적 시간이다. 이 종말론적 시간이 그녀의 나날을 새롭게 한다. 이렇듯 그녀는 시를 통해 세계가 막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는 것과 순간순간이 모두 유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입술을 가진 이래, 날개로 허공을 밀며 천 리를 날아온 시인은 그렇게 자유로이 홀로 또 천 리를 날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