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새로이 평가받는 작가,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
연극, 영화, 뮤지컬로 끊임없이 각색되어 사랑받는 고딕호러의 고전
지배 계급의 위선을 고발하고 로고스 중심의 서구 문명의 위험을 경고한 걸작
“내 사악한 행위의 추악한 얼굴이 나의 애원 사이사이 계속해서 내 영혼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19세기 영국, 스모그로 희뿌연 런던. 모두가 잠든 새벽 거리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한 사내가 길에서 마주친 어린 소녀를 짓밟고 가 버린 것. 설명할 길 없는 증오심을 일으키는 외모의 에드워드 하이드라는 사내는 보상금으로 수표를 건넨다. 그런데 수표 위에 기재된 서명은 명망 높은 의학 박사 헨리 지킬의 것이다. 변호사인 어터슨은 이 소식을 듣고 친구 지킬 박사가 맡겨 온 이상한 유언장을 떠올린다. 거기엔 그가 사망하거나 실종되면 친구 하이드에게 전 재산을 상속한다고 적혀 있다. 어터슨은 하이드라는 인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서고, 그와 직접 대면한 후 기이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하게 살았던 지킬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죗값을 치르는 것이라 생각하고 친구의 명예를 지켜 주기로 한다. 그러나 그가 만난 지킬은 더없이 평온해 보이고, 유언장이 그대로 이행되기를 고집한다. 그리고 일 년 후, 온 런던을 발칵 뒤집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유력 용의자로 하이드가 지목되는데…….
출간 6개월 만에 4만 부가 팔리고 빅토리아 여왕도 읽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는 독자와 비평가에게 공히 인정받으며 이후 ‘두 얼굴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선 대(對) 악이라는 우화로 이 소설을 바라보는 것은 당시 사회상과 계급이라는 맥락 안에서 통찰력 있는 드라마를 완성한 작가의 의도에서 한참 빗나간 것이다. 스티븐슨은 당대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체현한 주인공 지킬 박사의 위선과 그가 자기 안의 어둠을 투영한 하이드를 창조했으나 몰락하는 모습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의 로고스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나아가 세계 제국의 경영자를 자처한 대영제국의 지배층을 신랄하게 비꼬았다. 허구의 공간이 아닌 런던이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인간의 몸과 마음에서 발생한 공포를 다룬 이 소설은 오스카 와일드, 아서 코난 도일, 브램 스토커와 같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사후 오랫동안 진지한 작가로 취급받지 못했으나 프루스트, 헤밍웨이, 보르헤스, 나보코프 같은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호명되어 21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재평가받고 있으며, 찰스 디킨스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되는 작가 26위에 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내게 행복의 형태 중 하나였다.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스티븐슨은 평생 두 편의 걸작을 썼는데 그중 하나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이야기』이다. 생생한 이야기로 보든, 놀랍도록 깊고 진실한 우화로 보든, 이 소설은 엄청난 작품이다. _아서 도난 도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건』은 단순한 탐정 소설이 아니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고골의 『죽은 혼』과 같은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_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결핵으로 고통 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품에서 넘치는 에너지를 보여주었던 스티븐슨은 자신이 자라난 장로교적인 환경에 반발심을 느꼈고, 사회적인 명령과 관습적인 속박을 거부하면서 「지킬 박사와 하이드」(1886) 등의 명작을 남겼다. 1888년 남태평양 사모아 아피아에 정착해 행복한 시절을 보낸 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으나 1950년대에 이르러 비평가들 사이에서 독창성과 힘을 가진 작가로 호평 받게 되었으며 인간의 심리와 행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서스펜스 속에 녹여낸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대표작으로 「보물섬」(1883)이 있고, 그 밖에 「발란트래경」, 「유괴」,「물방앗간의 윌」, 「마카임」 등의 작품으로 주목받았으며 미완성작 「허미스턴의 웨어」는 극한에 이른 심리적 통찰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