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속도라는 이름의 욕망!
스피드광들이 놓친 속도의 황홀한 순간들을 읽다
배달 오토바이를 몰고 밤늦은 거리에 나와 질주를 일삼는 10대 폭주족들, 튜닝한 자동차를 끌고 빛과 같은 속도로 고속도로를 누비는 좀더 여유로운 폭주족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군상들이 질주의 순간을 즐긴다. 누군가는 마음속으로 꿈꾸던 자동차를 마침내 소유하게 되고 어떤 이는 언젠가 자동차를 갖게 될 날을 꿈꾸며 가슴 설레는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자동차를 보며 자란 아이는 자신의 자동차를 가지게 되면서 아버지를 넘어 서고 아이의 아이는 또다시 아버지를 넘어설 준비를 한다. 운전을 생업으로 가진 누군가는 자동차와 운전을 지긋지긋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동차란, 창을 활짝 열고 한적한 도로를 달리며 맞는 바람이란 오랜 욕망이자 로망이며 일종의 성취다.
쇠와 플라스틱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기계 중에 자동차만큼 시적(詩的)인 존재가 있을까? 자동차에는 꿈이 있고 열정이 있고 추억이 있고 그리움이 있다. 그런 점에서 시인과 자동차는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 이경섭(월간 『모터 트렌드』 편집장)
그렇다. 누군가 속도, 그리고 자동차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면 시인은 가장 적당한 화자라고 말 할 수 있다. 자동차는 눈앞에 존재하는 실체이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기도 하다. 자동차를 구성하는 금속의 프레임만으로는 자동차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자동차라는 하드웨어는 우리의 꿈과 추억, 욕망이 만들어낸 하나의 이미지이다. 이런 식의 이미지를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시인 말고 누가 또 있을까.
여기 한 시인이 속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속도라는 실체 역시 어느 순간 허상이 되고 만다.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한 시간을 달렸다면 그 사이의 속력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시속 100킬로미터지만 한 시간 후 내가 도달한 지점이 출발지와 동일한 지점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출발지로 도착하는 순간 한 시간 동안의 속도는 마법처럼 0이 되어 버린다. 속도는 물리적인 용어이지만 이렇듯 다분히 철학적인 용어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의 각 그랜저를 처음 산 것이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였으니, 각그랜저는 나의 20대를 온전히 지켜본 것이었는데……. 사라지는 각그랜저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내 눈에, 내 마음에 걸렸다. 팔려가는 각그랜저가 금방이라도 뒤돌아보고 눈물을 글썽일 것만 같아, 내 마음은 각그랜저가 사라진 도로 모서리에 오래도록 걸려 있었다. - p.105
필자의 기억 속에는 특히나 많은 자동차들이 자리 잡고 있다. 부모님이 목재소 운영을 위해 구입했던 일명 ‘쩜사’1.4톤 트럭과 ‘복사’라고 불리던 4톤 트럭은 고단했던 부모님의 노동과 함께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20대를 함께 보냈던 각그랜저를 비롯해 군 시절 내내 몰고 다녔던 군용차, 그의 첫 차였던 티뷰론까지 다양한 차들이 추억 속에 남겨졌다.
추억의 자동차들 외에도 아우디, 렉서스 등의 수입자동차들과 필자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매혹적인 차량이라 꼽은 칼리스타, 엘란과 같은 희귀한 국산 승용차 모델까지 여러 차종에 대한 자세한 뒷이야기들은 자못 흥미롭다.
국도와 고속도로, 길 위의 삶과 죽음으로 시작한 이 책은 폐차장에 대한 단상으로 끝을 맺는다.
폐차 처리된 사연도 가지각색이어서 온전치 자신의 일생을 다한 자동차가 있는 반면 사고를 당해 짧은 삶을 마친 자동차도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연들……. 우리의 삶이 담겨 있던 자동차. 그곳에는 이제 더 이상의 우리네 삶의 흔적이 없다. 차 안에 버려진 담배꽁초나 낡은 볼펜만이 예전의 모습을 희미하게 보여줄 뿐이다. 삶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삶이 공존하는 곳. 그곳이 바로 자동차이다. 그곳에는 출생을 위한 초조한 기쁨의 질주가 있고 죽음을 목전에 둔 슬픔이 존재하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자동차 그 자체가 죽음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 p. 186~187
수만 킬로미터에서 수십만 킬로미터를 평생 숨 가쁘게 달려왔을 수많은 사연의 자동차들. 수십만 킬로미터의 속도가 0이 되는 순간 그들은 죽음을 맞는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오프로드를 끝없이 질주하는 우리의 삶 또한 0킬로미터의 속도로 끝을 맺는다. 욕망과 열정이라는 짐을 벗기고 우리를 편한 곳으로 인도해주는 속도의 마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