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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아옌데의 <운명의 딸> 이후 이야기를 담은 연작소설 <세피아빛 초상>은 다섯 살에 충격적인 경험을 한 여자아이의 이야기다. 그녀를 보호하려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선택으로 과거와 단절된 채, 아우로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다. 자신이 누구인지, 부모가 누구인지도 말해주는 사람 없이 자라난다는 건 단순한 공백과는 다른 종류의 불안으로 남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등장하는 악몽, 사람들과 가까워지지 못하는 거리감 같은 것들. 순종적인 아내감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녀원 교육은 그런 아우로라에게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학교를 탈출하고 가출까지 감행하게 되고, 그 끝에서 친할머니는 아우로라를 데리고 고국 칠레로 돌아가 정착한다. 칠레를 비롯한 남미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아우로라를 둘러싼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복잡하게 얽혀간다. 인물들의 이야기가 워낙 흡입력이 있어서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과거의 장면들이 사진처럼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이야기를 읽는 방식이 조금 달라진다. 사건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더듬고 있는 느낌.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사진이 주요한 소재가 된다. 아우로라에게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자신을 낳은 직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출생을 짐작하고, 타인의 삶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상상은 언제나 어딘가 비어 있다. 사진은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그 안에 있었던 감각까지 전달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진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작동한다. 남편의 배덕한 불륜을 눈치채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숨겨져 있던 관계를 드러내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기억을 붙잡아두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장치.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아우로라에게 사진술을 가르쳤던 선생이 시력을 잃은 뒤, 그녀에게 사진을 말로 설명해달라고 부탁하는 순간이다. 이미지를 볼 수 없는 사람이 사진을 이해하려 하고, 정작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그것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 이 장면은 묘한 아이러니를 넘어, 기억과 인식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무엇으로 그것을 기억하는가. 이 소설은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이 부재한 상태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구성해 나가는지를 더 집요하게 따라간다. 아우로라는 사진, 타인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겪는 감정들을 통해 조금씩 자신의 삶을 재구성해 나간다. 그 과정은 완전한 복원이 아니라, 결핍을 끌어안은 채 새로운 형태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일에 가깝다. 내 ‘기억’이 어떠했든, 심지어 그것이 송두리째 사라져 희미해졌더라도, 내가 붙잡기로 선택하고 다시 엮어낸 것들만이 결국 나의 것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사야말로 나의 정체성이고, 새롭게 획득한 나의 ‘기억’일 것이다. 개인의 삶이 그러하다면, 잔인하고 혹독한 혁명과 독재의 역사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과거의 불행에 발목잡혀 추락하지 않는 것. 조국 칠레를 떠나 망명해야 했던 이사밸 아옌데가 말하고자 했던 것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________ 나는 내 유년 시절의 오랜 비밀들을 밝혀 내 정체성을 찾고 나만의 전설을 만들기 위해 글을 쓴다. 우리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결국 우리가 엮어 놓은 기억뿐이다. 각자 자기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한 빛깔을 고른다. 나는 백금 사진의 영구적인 선명함을 고르고 싶다. 그러나 내 운명에는 그런 빛나는 구석이 조금도 없다. 나는 모호한 색깔들과 불분명한 미스터리,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이야기는 세피아빛 초상의 색조를 띤다. 세피아빛 초상 | 이사벨 아옌데, 조영실 저 #세피아빛초상 #이사벨아옌데 #민음사 #운명의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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