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정시의 아름다운 진화 “극빈의 미학, 수평의 힘”
최근 문단의 굵직굵직한 시문학상을 섭렵하다시피 하며 가장 바쁜 행보를 보여주는 문태준(文泰俊) 시인의 세번째 시집 『가재미』(2006)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전 시집 『맨발』(2004) 이후 두 해를 지나오면서 문태준은, 각종 문예지에 발표하는 시들마다 오래된 된장처럼 곰삭은 시어와 특유의 고요한 서정시학으로 시 애호가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그의 다음 시집을 궁금케했다. 제5회 미당문학상(2005) 수상작 「누가 울고 간다」와 제21회 소월시문학상(2006)을 수상한 시 「그맘때에는」을 비롯해, 그간 발표해온 총 67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이번 시집에 실렸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인 「가재미」 역시 지난해, 시인과 평론가 120여 명이 참여해 뽑은 ‘문예지에 실린 가장 좋은 시’로 선정된 바 있다. 김소월과 백석, 그리고 박목월과 조지훈에게로 이어지는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문단·평단의 부러움 섞인 상찬 속에 문태준은 2004~2005년 ‘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문명의 이기와 폭력에 짓눌린 개인의 상처 혹은 그것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개인의 욕망이 탈문법, 탈서정의 시어와 행간에 춤을 추듯 무게 실린 근래 젊은 시인들의 시숲[詩林]에서 문태준은 유독 전통 서정시의 그늘을 고집하는, 70년생 30대 시인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존재다. 이번 시집에서 우리는 또 한번, 그의 유년 시절, 고향 마을 어귀의 고갯길, 뜰, 채마밭, 빈 처, 허공, 오래된 숲과 사찰 경내, 계절,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미약한 존재 등 이미 문태준의 이전 시를 통해 익숙해진 장소와 시간이 빚어낸 또 다른 무늬를 밟게 된다. 문태준의 시는, 그저 창가와 문턱에 앉아서 사물과 자연을 관조하고 그리하여 마음에 떠오른 심상을 상징과 비유로 그려낸 것이 아니다. 일단 시인은 “붉고 젖은 흙길”을 마다하지 않고 “바람의 살”(「나는 오래 걷는다」)을 만지며 부지런히 걷고 또 걷는다. 그렇다고 바깥에 서 있는 자의 어쭙잖은 시선으로 사물과 자연의 안쪽에 섣부른 일체감이나 동질감의 악수를 청하지 않는다. “물렁물렁한 바퀴”(「思慕」)처럼 부지런하고 탄력 있는 그의 발걸음과 창조적인 시선은 낯익은 풍경을 번뜩이는 낯선 상상력으로 백지에 찍어낼 줄 안다. 이를테면 “먼 곳 수평선 푸른 마루” 속에서 흔들리는 “격랑”(「마루」)의 소리를, “한 마리 잠자리가 만들어놓은” 고요한 수평 속에서 주위를 둘러싼 풍경의 “병풍”(「水平」)이 쓰러져버리는 순간을,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누워 있는 그녀 곁에 나 역시 나란히 누워 “그녀가 살던 파랑 같은 날들”(「가재미」)을 그려보는 마음 모두를 시인은 제 안으로 끌어들인다. 때문에 그의 발걸음은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풍경과 벌레와 사람의 속내로 접근해간다. 애초에 시인의 것이 아닌, 멀리 떨어져 있는 그들 마음 한끝에라도 가닿으려면 “너무 빠른 것은 슬프”(「바깥」)고, “피로처럼 꽃잎 지는 나”를 바로 보기 위해서라도 “슬로비디오처럼 뒤로 뒤로 주섬주섬 물러나고 늦추”(「극빈2」)는 자세가 필요한 탓이다. 여기에 불교적인 관념과 사물에 대한 간절한 관찰과 오랜 사유가 문태준만의 오롯한 시어와 만나 독특한 서정을 완성하고 있다(“검게 옻칠한 관 속을 한 빛이 흐른다/빛에도 客愁가 있다/움직이는 빛 사이를 흐르며 나는/목숨이 다하면 가 머무르는 中陰을 생각하느니/이생과 내생 그 사이를 왜 습한 그늘이라 했을까/매미는 그늘 속을 흐르다/ 나무 그늘로 돌아온 목숨/매미는 누굴 찾아 헤매어 이 여름을 우나”―「옥매미」 부분). 시로 변주되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들지 않고, ‘바깥’에서 빌려왔다고, 그래서 돌려주어야 한다(시인의 산문-시집 뒤표지 글)고 고백하는 시인에게 평론가 이광호는, “사물의 현실적 효용성뿐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주체의 심미적 욕망마저 비우는 극빈과 수평의 시학”을 펼치는 “겸손한 서정”(이광호 시집 해설)이라고 답했다. 문태준 시집 『가재미』를 펼쳐 드는 순간 우리는, 그가 간직한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흉측한 웅덩이”에서 길어 올린 “황홀한 폐허”(「슬픈 샘이 하나 있다」) 속 지독한 서정과 깊은 통찰을 먼저 만나고, 이어 미처 우리가 의식지 못했던 삶의 결과 무늬, 흔적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