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밖으로 나온 건 나였다”
―거울 너머 보이는 낯선 나, ‘너’의 세계
일상어의 중력을 벗어난 독특한 시어, 자연에 대한 전위적이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층위의 시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민구 시인의 첫번째 시집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1983년 인천에서 태어나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은 총 48편의 시가 담긴 첫 시집에서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큰 화두 아래,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여러 경계들을 지워나가며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탐구한다.
시인의 자아상은 항상 불분명하다. 그는 방 안에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묻는다. 이것은 ‘나’인가? 그러나 ‘나’는 거울 밖에 있는 자신이므로 그것은 ‘나’일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너’인가? 그것은 ‘나’이면서 ‘너’이고, 그러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거울아 녹아라
내가 흐르게
흘러 나오게
근데 우리 둘
같이 있으면
얼마나 어색할까
―「房―거울」 부분
자, 이제 거울은 녹아 흘러나오고, 이 ‘안’과 ‘밖’이 섞인 세계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거울 속의 내가 손을 뻗으며 이쪽으로 나오기도 하고, 거기서 흘러나온 온갖 사물과 풍경 들이 현실의 방을 잠식해버리기도 한다. “물이 싫은 나의 고양이”는 “그림의 난간”으로 건너들어가고, “죽은 사상가”는 시가를 놓치고 “텀블러 안”으로 달아난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떠올리게 하는 시. 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태는 시인이 스스로 의도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모든 것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만다. 이 물렁물렁한 세계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모든 사물이 멎지 않고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 정도다.
거울,
너는 너를
어디에 비춰볼까
그런 게 있다면
나는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거울,
모르겠다
너에게 무엇을 바쳐야 할지
―「房―미래」 부분
그리하여 이 무경계의 상황에서 그는 방향을 잃고 헤맨다. “거울에 비친 나를 더듬는”다.(「房―촛불」) ‘더듬거리며 말하는 자’야말로 시인이 아니던가.(들뢰즈) 기형도는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궜지만(「빈 집」), 민구는 오히려 방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거울 속의 세계가 흘러들어와 꽉 차버린 방. 그리하여 마침내 텅 비어버린 방.
나의 내부, 기울고 습한 창고에서 꺼낸 연장은 녹이 슬고 날이 무뎠지만 어둠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자르고 끼워맞추기 쉬웠다
―「독서」 부분
이 텅 빈 방의 세계에서는 현실의 중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모든 사물과 존재가 저 자신의 마음의 갈피를 좇아 흐르고 서로에게 뒤섞인다. 어떤 질서와 논리 들도 무색해진다. 그리하여 그곳에서는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저녁 강가에 배 두 척이 나란히 놓여 있다
저것은 망자가 벗어놓은 신이다
저 신을 신고 걸어가서
수심을 내비치지 않는 강의 수면을 두드린다
거기엔 사공도 없이 홀로 산으로 간 배들을 모아서
깨끗이 닦아 내어주는 구두닦이가 계신가
(……)
그때 누가 나무 밑에서 걸어나와
빈 배에 올라타는지 그의 신발 뒤축에 끌려
산아래부터 중턱까지 흙부스러기가 쏟아진다
또 한번 배가 산으로 가나?
너의 낡은 구두가 빛난다
살아서는 신지 못할
―「배가 산으로 간다」 부분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우스개 섞인 속담의 아이러니는, 민구의 시 속에서 새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저녁 강가의 배 두 척”은 “망자가 벗어놓은 신”이다. 이 커다란 신을 신고서 어찌 산으로 갈 수가 없겠는가. 그러나 그 신발은 또한 “망자”의 신발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이면의 세계에서만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고 강조하여 말한다.
잠든 나의 구두를 신고서
거울 속으로 걸어가는 이
사라진 거리를 헤매다 온 너의 부르튼 발
꼼지락거리는 열 개의 발가락으로
이곳에 없는 바다를 유영하는 오징어
너의 모자를 벗기면,
나는 그물을 들고 있다
그물망 사이로 아무것도 없이
빛나는 바다를 본다
-「房-거울 너머」 부분
“그물망 사이로 아무것도 없이/ 빛나는 바다”. 그곳은 “거울 너머”의 세계이다. 이 도저한 세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시인은 구두를 신고, 그물을 들고 “사라진 거리”를 헤매지만, 결국 그물망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어디에도
나만의 것은 없다
나의 이름, 내 목소리
죽은 거리를 애도하는 악사
그리고 너에게 바치는 유일한 시
멀리 있는 네게 편지를 쓴다
―「공기―익명에게」 부분
민구의 시는 익명에게 쓰는 편지다. 그는 자신에게,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정성껏 편지를 쓴다. 어쩌면 그 편지는 내용 없는 빈 종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너에게 바치는 유일한 시”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공기처럼, 어쩌면 이 편지들도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어떤 마음들을 조심히 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목소리는 애써 귀기울이지 않더라도 모두의 귓가에 시나브로 스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