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선집’은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 기획했습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한국 근현대 수필을 대표하는 주요 수필가 50명을 엄선하고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를 엮은이와 해설자로 추천했습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습니다.
노천명(1911∼1957)은 섬세한 감수성과 절제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마리 로랑생’, ‘ 앨리스 메이넬’에 비견되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다. 이화 여전 시절부터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시원≫ 창간호에 <내 청춘의 배는>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정식 데뷔했다. 특히 1938년 ≪산호림≫이라는 시집을 첫 출간, 경성 호텔에서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 은사들을 비롯한 문단 주요 인사들과 출간회를 하는 등 당대 여성 엘리트 시인으로 주목받았다. 당대 문단에서 노천명에게 보인 이례적인 찬사들은 기실 20세기 초부터 진행된 신여성 담론의 문맥을 살필 때 조금 더 분명해질 수 있다.
우리 문학 담론 속에서 여성 작가의 위치는 시의성을 띠고 변화해 왔다. 나혜석, 김일엽을 비롯한 1세대 여성 작가들이 이른바 ‘신여성’으로 명명되며 사회 개조의 중축으로 호명되었다면, 이들이 일으킨 사회적 파장이 현실적인 괴리로 좌절되자 개조의 파격성은 경조부박(輕?浮薄)한 ‘모던 걸’의 세태로 폄하된다. 1930년대 본격적인 활동을 한 노천명을 비롯한 2세대 여성 작가들은 앞 세대에 대한 부담감 속에 작품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희소성을 지닌 지식인 여성에 대한 사회적 호기심 및 역할 기대의 측면이 있는 한편, 신여성의 행태는 철저히 비판된다.
1910년대 출생하여 진명여고보를 거쳐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1935년 문단에 진출, 조선 중앙일보 기자가 된 노천명은 여성의 근대 교육, 엘리트 코스를 밟은 신여성으로 근대 초기부터 진행된 여성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호림≫ 등 그녀의 시에 대한 이례적인 찬사 및 화려한 출간 기념회 등은 노천명에 대한 문단적 관심을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노천명은 여성적인 섬세한 감각을 지니면서도 감상적이지 않은 절제미의 시학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나혜석, 김일엽 등 1세대 여성 작가들이 보여 준 선각자로서의 면면이 긍정/부정의 측면에서 거론되었다면, 노천명은 모윤숙, 최정희와 더불어 여성 시인(작가)의 내면을 작품으로 실체화함으로써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문단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노천명은 시뿐 아니라 다수의 수필을 발표했는데, 그녀의 시가 문학사적 맥락 속에서 평가되었다면 수필은 시대사적 맥락 속에서 곤고히 진행된 그녀의 삶의 단편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제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천명 시에서 보이는 섬세한 감각과 절제미는 수필로도 이어지는바 대상에 대한 세밀한 접근과 정갈한 문체가 바로 그것이다. 노천명은 생전에 ≪산딸기≫(1948)와 ≪나의 생활백서≫(1954) 두 권의 수필집을 낸 바 있다. 이 수필집에는 풍요로웠던 유년에서부터 시대적 격랑을 통해 부박하게 되는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이 노천명만의 군더더기 없는 담박함 속에 그려진다. 이 작품집 속에 ‘여성’은 다양한 삶의 양태로 제시되는데, 일상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역사적 격랑 속에서도 본원적인 활력을 잃지 않는 역사적 실체로서 의미화된다. 또한 여성적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전통미의 오라를 지닌 심미 기제로서 작동되기도 한다.
노천명의 수필 세계 속에서 여성적인 심미안은 가장 일상적인 생활의 문제에서 예술성의 감각으로 역사적 어젠다의 차원으로까지 전방위적으로 펼쳐진다. 시대가 부여한 곤고한 삶을 여성적 활력으로 답하는 생명력 넘치는 여러 삶을 조명하는 한편, 전통적 심미 속에서 여성 고유의 아름다움을 부각하고자 하는 노천명의 시선은 남성적 젠더 규범 속에서 ‘예술가?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투영된 것이다. 노천명이 여성 담론의 한 중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오직 여성 작가로서의 자의식 속에 가다듬었던 점, 시대적 격랑 속에서도 문학적 자기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노천명이 보여 주는 여성적인 심미안은 전통성과 여성성의 관계 국면 속에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신여성 담론에서 가장 문제적인 지점이 신(근대)/구(전통) 여성의 갈등 국면이며, 서구적 이상을 바탕으로 한 1세대 신여성들이 보여 준 자기 개조의 문제가 구여성 문제를 포섭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라면, 노천명 작품 속에 드러나는 여성성/예술성/전통성의 문제는 그러한 경계 지점에서 새로운 논의를 가능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