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디 접속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강제 새로 고침(Ctrl + F5)이나 브라우저 캐시 삭제를 진행해주세요.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리디 접속 테스트를 통해 원인을 파악하고 대응 방법을 안내드리겠습니다.
테스트 페이지로 이동하기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 상세페이지

소설 영미소설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

정원 아래서 외 52편
소장종이책 정가20,000
전자책 정가30%14,000
판매가14,000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작품 소개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 실존의 역설과 변이에 대한 최고의 기록자 그레이엄 그린

‘20세기’라는 장르의 최고 작가. 《뉴욕 타임스 북 리뷰》
1904년 태어나 1991년 영면하기까지 격변과 혼란의 20세기 자체를 살면서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로 ‘시대’와 ‘인간’을 기록했던 영국의 문인 그레이엄 그린. 살아생전 폭발적인 대중의 인기와 문단의 찬사를 동시에 누렸던 희귀한 작가의 거의 모든 단편을 수록한 『그레이엄 그린Complete Short Stories by Graham Greene』(2005)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스물네 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인물로 여겨지는 그린은 예리한 통찰과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인간성의 심연, 양가兩價적인 도덕, 현대사회의 모호성을 가열하게 파고들었고, 정치, 성性, 범죄, 종교, 경제, 세계정세, 언론 등 20세기의 주요 화두를 쟁점화한 작품들을 통하여 ‘소설이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다.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한때 공산주의에 공명하고, 세계대전 중에 MI6(비밀정보부)에서 첩보원으로 활동했으며, 국교회가 지배적인 나라에서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아프리카와 같은 야생의 장소를 끊임없이 찾아다닌 독특한 이력은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팽팽하게 오가며 실존의 진리를 드러내려 했던 그의 작품 세계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작품을 순수문학과 오락물의 두 가지로 분류하여 발표했는데, ‘스릴러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순수문학과 ‘고도로 윤리적이고 심미적인’ 오락물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초월한 활약을 보이며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 20세기 스토리텔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영어로 쓰인 정전正典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그린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 남아 있다. 또한 긴장감, 간결성, 극도로 편집된 대화, 속도감 있는 전개는 독자를 매료시키는 영화적 특성이 있어서, 여러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레이엄 그린』은 67년에 걸친 작품 활동 기간 중 네 시점에 출간한 단편집―1954년에 출간한 『21가지 이야기』(21편), 1963년에 출간한 『현실감』(4편), 1967년에 출간한 『남편 좀 빌려도 돼요?』(12편), 사망 1년 전인 1990년에 출간한 『마지막 말』(12편)을 한데 모은 것으로, 여기에 기존에 단행본의 형태로 발표되지 않았던 4편을 추가하여 53편을 한 권으로 엮은 그린 단편소설의 ‘완전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린 탄생 100주년을 맞아 펭귄 클래식에서 선보인 새 판본들 가운데 실상 유일하게 최초로 소개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문학성과 대중성을 함께 갖춘 그의 단편소설을 한자리에서 음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기에 따른 작품(장편소설) 경향의 미묘한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작품을 아우르는 일관성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단편선은 큰 의미가 있다.


그린에 대한 참으로 강렬하고 가슴에 와 닿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짧은 비녜트에 담겨 있다. ‘역설에 대한 사랑. 모든 역설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인간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자세. 경계의 나쁜 쪽에, 타락한 사람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 태도. 그리고 흔히 도둑의 우애에 불과할 뿐인 동료애이지만, 그럼에도 실감 나는 핍진한 묘사.’ 동경과 희극적 요소를 함께 엮어 내는 그린의 능력과 정서적, 정치적 거미줄을 대단히 정교하게 짜서 미세하게 살짝만 닿아도 거미줄이 흔들리게 만드는 그린의 기교는 흔히 그의 단편소설을 간과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단편소설의 고전적인 대가들은 단일한 정서나 단일한 인물, 또는 반어적 인간성에 대한 단일한 태도를 그려 내는 대가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린의 특징적인 영역은 이중성이다. 분열된 충성심, 모순된 감정이 그의 특징이다.
_피코 아이어의 「해제」에서


매일 꾸준히 500단어씩 써 내려가며 분량을 채우면 그날의 글쓰기를 그만두었다는 그린은 장편소설과 달리 열린 결말이 필요한 단편소설의 기법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여러 차례 고백했다. 하지만 그가 장편뿐만 아니라 단편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최고 수준의 거장이라는 것이 세계 문단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흔히 그를 ‘양가적인 도덕 방정식을 지닌’ ‘역설의’ 인간이라 일컫는데 여기 실린 작품들은 그 어떤 장편소설에서보다 그러한 작가의 모습을 더 잘 포착하여 보여 준다.
『그레이엄 그린』의 테마는 순수이다. 정원 안에 있는 순수한 사람들은 모험과 위험과 탈출을 열망하고, 반면에 담장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시 정원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린은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것과 새로운 것을 갈망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뒤에 두고 온 것들과 자신의 뿌리를 찾아 나서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서 각 단편에서 이 두 정서가 대위對位적으로 작용하여 어느 한쪽이 더 강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서로 절제된 소리를 내면서 하나로 합쳐진다. 사랑, 강박, 열정, 환상, 환멸, 꿈, 공포, 연민, 폭력…… 인간이 경험하는 온갖 극한의 감정들을 조명하는 53편의 작품들은 때로는 냉소적이면서 기지 넘치게, 때로는 탐색하면서 철학적으로 그레이엄 그린을 드러낸다.

그린은 한 인터뷰에서 가장 잘 쓴 단편으로 「파괴자들」「레버 씨의 기회」「정원 아래서」「8월에는 저렴하다」를 꼽았다. 그는 이들 작품의 어떤 요소가 마음에 드느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가독성readability”이라고 답하면서 그 점을 지적하는 평론가는 많지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기에는 상징이나 모호성을 높이 사고, 재미있게 읽히는 직선적인 글을 얕잡아 보는 문학적 스노비즘을 향한 은근한 비판이 담겨 있다. 그는 묘사를 가능한 한 제거하고 외부 세계를 낭비 없이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을 글쓰기의 목표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이 꼭 쉽게 읽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문학적인 기교는 덜 중시한 반면에 인간의 내면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가열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가 이야기하는 바를 다 알아들었다고 생각할 때면 다시 한 꺼풀 더 벗겨 내어 반전의 재미를 선사하거나 인간성의 심연을 드러내곤 한다. 묵직한 작품은 묵직한 대로, 가벼운 소품처럼 여겨지는 작품은 또 그 나름으로 한껏 매력을 발산한다.
타계하기 얼마 전에 그린은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을 받고 “몇 권의 좋은 책들”이라고 대답했다. 이 단편선은 그 ‘좋은 책들’의 하나이면서 출발점이자, 그린의 ‘스토리텔링의 대가’로서의 면모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한편 그의 단편 중 18편이 영국에서 1975년과 1976년 <그린의 그림자>라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 두 시즌 동안 방영되어 많은 독자와 시청자들이 화요일 저녁 9시를 기다렸다고 한다.

■ 추천사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영국 작가 중 한 명. 그는 소설에 명백히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왔다. _《데일리 텔레그래프》

20세기의 어떤 작가도 그레이엄 그린만큼 대중의 상상력을 완벽히 파고들어 형상화하지 못했다. _《타임》

문학의 역작. 그린의 예술성은 진귀하고 걸출하다. _《선데이 타임스》

이 책에서 그레이엄 그린은 그가 평소에 머물러 있던 탁월함이라는 수준을 넘어섰다. _《스펙테이터》

단편소설에서 플롯은 필연적으로 장편소설에 비해 중요하지만 서술 양식보다는 덜 중요하다. 그리고 이 책의 서술 양식은 모든 소설적 방법 가운데 가장 진귀하다는 점에서 대가의 명성에 걸맞을 뿐만 아니라 충실하다. _《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러먼트》

그린의 정수精髓. 명작이다. _《옵서버》

최상의 이야기꾼. 그는 직접 축적한 지방색을 되살리는 재능, 극적인 것에 대한 예리한 감각, 대화를 위한 눈, 문장의 속도를 유지하는 기술을 지녔다. _《뉴욕 타임스》

순전한 경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_《가디언》

독보적. 그레이엄 그린은 20세기 인간의 의식과 불안에 대한 궁극의 기록자다. _윌리엄 골딩

실제 인간을 정확히 아로새긴 움직이는 초상에 정통한, 가장 독창적이고 진보적이며 흥미진진한 우리의 소설가. 스토리텔링의 대가. _V. S. 프리쳇

모든 세대를 향해 멋지게 이야기한 위대한 작가. 마치 선지자처럼. _앨릭 기니스(배우)

그린은 자신의 책을 넘어서는 힘이다. 그는 국외자, 반대자, 환속 사제, 실패자, 고전적인 약자 같은 등장인물들로 수십만 독자를 풍요롭게 하는 소설과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_멜빈 브래그

20세기의 어떤 작가도 그린만큼 인간을 비교하는 데 있어 예민한 정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나마 몇몇 소설가들이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분 짓기 위해 넓은 선을 긋는 상황에서 그린은 다중적인 구별의 대가였다. _제이디 스미스

그레이엄 그린은 위트와 우아함과 인물과 이야기와 탁월한 보편적 연민을 지녔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를 항상 세계문학적 위치에 머무르게 한다. _존 르 카레

■ 본문에서

“넌 투덜이 영감이 많이 미워?” 블래키가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T가 말했다. “영감을 미워한다고 해서 재미가 있는 건 아니잖아.” 불붙은 마지막 지폐가 그의 음울한 얼굴을 밝혔다. “미움과 사랑 같은 것은,” 그가 말했다. “나약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아. 그저 사물들만이 있을 뿐이야, 블래키.” T는 실내를 둘러보았다. 실내에는 반쪽이 난 사물, 부서진 사물, 이전의 사물들의 낯선 그림자가 널려 있었다. “집에 누가 먼저 가나 경주하자, 블래키.” 그가 말했다.
_ 「파괴자들」에서

“그의 계획을 그처럼 단순한 것이나 어설픈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마주 앉은 상대가 말했다. “그 가엾은 사람의 기질에는 사랑보다 증오가 훨씬 더 많았어요. 당신이라면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는 것을 증오할 수 있겠어요? 그럼에도 그 사람은 자신을 자유사상가라고 불렀답니다. 자유롭다는 것과 그처럼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잖아요. 그 방학 기간 내내 그의 강박관념은 나날이 커져 갔던 게 틀림없어요. 그러나 그는 참고 있었어요.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말한 ‘그것’이 그에게 힘과 지혜를 주었는지도 몰라요. 그는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에야 그토록 깊은 관심을 쏟고 있던 문제에 대해 얘기를 꺼냈어요.”
_ 「설명의 암시」에서

공원까지 가는 동안 내내 욕정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사랑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있는 거라곤 성욕뿐이었다. 사랑을 하는 데는 좋은 옷과 차가 있어야 하고, 어딘가에 아파트가 있거나 좋은 호텔에 갈 수 있어야 했다. 그럴듯한 치장이 필요했다. 그는 종일토록 방수 외투 속의 지저분한 넥타이와 해어진 소매를 의식했다. 자신의 몸뚱이를 넌더리 나는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꾸역꾸역 데리고 다녔다. (대영 박물관의 열람실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몸이 다시 자신을 불러냈다.) 그는 공원 벤치에서 저질렀던 추잡한 행위들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었고, 그게 그의 유일한 정서였다. 사람들은 몸이 곧 죽는 것처럼 말했는데, 그것은 크레이븐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몸은 계속 살아 있다. 반짝이며 내리는 빗속을 걸어 연단이 있는 곳으로 갈 때, 그는 ‘몸이 다시 소생할 것이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검은 정장 차림의 조그만 남자 곁을 지나쳤다. 꿈 하나가 떠올랐다. 그 꿈 때문에 그는 세 번이나 몸을 부르르 떨면서 깨어났다. 온 세상의, 거대한 암흑 동굴 같은 매장지에 그 혼자 있었다. 땅속에서 무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무덤과 연결되어 있었다. 세계가 죽은 사람을 위해 벌집 모양의 공간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매번 다시 꿈을 꿀 때마다 그는 몸이 썩지 않는다는 섬뜩한 사실을 새로이 발견하곤 했다. 거기엔 벌레도 없고, 분해 작용도 없다. 지하 세상에는 무사마귀, 부스럼, 발진과 함께 다시 소생할 준비가 된 수많은 죽은 살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결국 몸은 타락한다는 것을―‘크게 기쁜 소식’으로―상기했다.
_ 「에지웨어로 인근의 작은 극장」에서

“불쌍한 노인.” 형사가 말했다. “노인은 저 개를 사랑한 게 틀림없어.” 사실, 그가 쓰러져 누워 있는 자세를 보면 개를 때리려 했다기보다는 쓰다듬어 주려 한 것 같았다. 나는 그가 개를 때리려 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형사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그 나이 많은 백만장자 사기꾼이 환전상들의 오두막 사이에서 팔을 개의 목에 걸친 채 죽어 누워 있다는 게 나로서는 사실로 믿기 어려울 만큼 애처롭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 본성의 견지에서 보면 초라하기도 했다. 그는 뭔가를 위해 강을 건너왔는데,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은 결국 그 개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신 위에 앉아 아둔한 잡종견답게 의기양양하게 짖어 대는 개의 모습이 마치 슬픔을 자아내는 조각상 같았다. 그는 팔을 개의 목에 걸침으로써 고향의 들과 도랑과 지평선에 가까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희극적이었다. 측은했다. 그가 죽었다고 해서 희극적인 성질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죽음이 희극을 비극으로 바꾸지는 않는다. 만약 그 마지막 손동작이 애정의 표시였다면,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절망보다 훨씬 더 오싹한 근거 없는 낙관주의―능력을 한 번 더 보여 주는 행위였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_ 「다리 저쪽」에서

[…] 도덕은 한 인간이 동료들과 함께 행복하게,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레버 씨는 행복하지 않았고 성공하지도 못했으며, 이 답답한 작은 천막 안에 있는 그의 유일한 동료는 ‘광고의 허위성’이나 레버 씨가 이웃집 소를 탐하는 것에 신경을 쓸 처지가 못 되었다. 관념이란 것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지리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면 자신의 관념을 온전히 지킬 수 없게 된다. ‘죽음의 엄숙함?’ 죽음은 엄숙하지 않다. 죽음이란 것은 레몬같이 노란 피부와 검은 토사물일 뿐이었다. ‘정직은 최선의 방책?’ 그는 갑자기 이 말이 얼마나 허위적인지 깨달았다. 이제 그는 타자기 앞에 행복하게 앉아 있는 무정부주의자였다. […]
_ 「레버 씨의 기회」에서

당신에게 묻겠는데, 하루를 버는 것이 그에게, 또는 당신에게 뭐가 중요한가?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위해 하루를 번다는 말인가? 여행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대신에 친구를 하루 일찍 만나겠지만, 막연히 여유롭게 머무를 수가 없고, 24시간 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올 때도 비행기를 타고 와서 다시 하루를 벌 텐가?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위해 하루를 번다는 말인가? 하루 일찍 일을 시작하게 되겠지만,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해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일을 하루 일찍 끝내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그렇다고 하루 일찍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살뜰히 보존해 온 그 24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당신은 하루를 번 것이 얼마나 경솔한 짓이었는지 깨달을 것이다. 당신은 벌어들인 날들을 앞으로 밀쳐 두고 또 앞으로 밀쳐 두겠지만, 언젠가는 그것들을 써야 하는 때가 오게 마련이고, 그때는 그날들을 오스탕드발 기차 안에서처럼 천진난만하게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할 것이다.
_ 「하루를 버는 것」에서

불성실해라. 그것이 인류에 대한 너의 의무다. 인류는 살아남아야 하는데, 성실한 사람은 불안, 총탄, 과로 따위로 먼저 죽으니까 말이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성실함을 대가로 바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중 인간이 돼라. 그리고 양쪽 어느 편에도 절대 너의 진짜 이름을 알려 주지 마라. 여자와 하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지. 둘 다 자신들이 소유하지 않은 사람을 존중한단다. 그래서 이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점점 더 비싸고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하려고 할 거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냐? 탕아가, 잃어버린 돈이, 길 잃은 양이, 성실했더냐? 순종하는 양 떼는 목동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고, 성실한 아들은 아버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_ 「정원 아래서」에서

“내가 다시 돌아가도 믿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두려워하는 게 바로 그거요, 던롭 씨. 내가 계속 성체를 멀리하는 한, 내 믿음이 부족한 건 교회의 논쟁거리일 거요. 그러나 내가 돌아갔는데 믿음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땐 나는 정말로 신앙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요. 사람들을 낙담시키지 않기 위해 얼른 무덤 속으로 들어가 숨는 게 나은, 그런 사람이 되는 거란 말이오.” 그가 불안스레 웃으며 말했다. “역설적이지요, 던롭 씨?”
_ 「모랭과의 만남」에서

그녀는 자신이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 거대한 대륙의 속살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국은 찰리였고 뉴잉글랜드였다. 그녀는 책과 영화를 통해 자연경관을 알았다. 예컨대 로웰 토머스가 특유의 상투적인 방식으로 제작하여 오색사막과 그랜드캐니언의 격을 떨어뜨린 대형 시네라마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마이애미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케이프코드에서 퍼시픽팰리세이즈까지, 어디에도 미스터리는 없었다. 모든 요리 접시에 토마토가 나왔고, 모든 잔에 코카콜라가 나왔다. 어디의 누구도 실패나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았다. 실패와 두려움은 ‘은폐된’ 죄 같은 것이었고―죄는 매혹적인 부분이라도 있지만 이것들은 그런 것도 없으므로 아마 죄보다도 더 나쁠 것이다―나쁜 취향이었다. 그러나 여기 브룩스브라더스와는 거리가 먼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침대 위에 뻗어 있는 노인은 부끄러움 없이, 미국 악센트로 실패와 두려움을 얘기했다. 그녀는 마치 뭔가 재앙이 닥친 후의 먼 미래에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_ 「8월에는 저렴하다」에서

우리가 별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끔찍한 것이다. 칼자국과 잉크 얼룩으로 더럽혀진 옆 책상을 썼던 옛 친구를 40년 만에 길에서 만났을 때, 그에 대한 달갑지 않은 기억으로 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지어 아기일 때도 우리는 자기 안에 미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옷은 우리를 바꾸지 못한다. 옷은 우리 성격의 유니폼이고, 성격은 코의 모양이나 눈의 표정만큼이나 별로 바뀌지 않는다.
_ 「생각하면 끔찍한 것」에서

“나 스스로도 자주 축복을 한다네.” 노인이 말했다. “사랑하고 싶지만 아무리 해도 사랑할 수 없을 때가 있어. 그러면 두 손을 뻗어 말하는 거야. 하느님, 사랑하지 못하는 저를 용서하소서. 그렇지만 아무튼 이것을 축복해 주소서라고. 나한테 삽이 하나 있는데, 손잡이가 늘 헐거워져서 내 발을 찍기도 하지. 그래서 난 삽에다 축복을 내렸지. 축복을 하거나 부러뜨려야 하는데, 우리 집은 삽을 부러뜨려도 괜찮을 만큼 넉넉하지 못하거든. 또 어떤 여자가 매주 나를 찾아와 우리 개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네. 그녀는 우리 개를 거세하라고 하지. 불쌍한 여편네 같으니. 난 그럴 수가 없어. 그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거든. 그 여자는 나한테 온갖 욕을 퍼붓지. 그럴 때 난 손을 내밀어. 그런 다음 그 여자를 축복한다네. 불쌍한 여편네야. 왜냐하면 난 그녀를 사랑할 수 없으니까.”
_ 「축복」에서

※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세계문학 단편선>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장편소설 위주의 관습에서 벗어나 단편소설에 초점을 맞춘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는 그동안 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거장들의 주옥같은 작품들과 단편소설이라는 장르의 형성과 발전에 불가결한 대표 작가들을 소개할 것이다. 아울러 지구촌 시대에 걸맞게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문학의 변방으로 여겨져 왔던 나라들의 대표적 단편 작가들도 활발히 소개해 단편소설의 발전이 문화의 중심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독자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현대 대중문화의 성장은 전 세계적으로 미스터리, 호러, SF 등 문학 장르의 분화를 촉진했는데 이러한 장르문학의 형성에도 단편소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한 장르문학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가들의 단편 역시 새롭게 조명할 것이다.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편소설은 그리스 신화가 그러했듯이 삶의 불변하는 단면을 촌철살인의 관찰력과 응축된 예술적 형식으로 꾸준히 생산해 왔다. 작가들이 저마다의 개성으로 그린 칼로 베어 낸 듯 날카로운 인생의 다양한 단면들은 시공을 초월해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새로운 문학적 기법과 실험의 도입을 통해 단편소설은 현재도 계속 진화, 확장되고 있다. 작가의 예술적 열정이 가장 뜨겁게 투영된 다양한 개성의 다채로운 단편들을 통해 문학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통찰과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는 문학작품은 독자가 앉은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짧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쁜 일상의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세계문학 단편선>은 중심을 잃지 않고 삶과 사회, 나아가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될 것이라 믿는다.


저자 프로필

그레이엄 그린 Graham Greene

  • 국적 영국
  • 출생-사망 1904년 - 1991년
  • 학력 옥스퍼드대학교 근세 유럽사

2016.03.25.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 저자: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 1904~1991)
‘“20세기”라는 장르의 최고 작가’(《뉴욕 타임스 북 리뷰》).
격변의 20세기 거의 대부분을 살면서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로 시대와 인간을 기록했던 영국의 문인 그레이엄 그린은 세계문학사에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하고 복합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때 공산주의에 공명하고, 세계대전 중에 MI6(비밀정보부)에서 첩보원으로 활동했으며, 국교회가 지배적인 나라에서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아프리카와 같은 야생의 장소를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등 독특한 이력을 소유한 그의 글쓰기의 출발점은 극심한 우울증이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몇 차례 자살을 기도했는데 정신과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글쓰기를 권했다. 그린에게 있어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자기 구원의 방식이자 실존의 문제였던 글쓰기는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폭발적인 대중의 인기와 문단의 찬사를 동시에 누린 희귀한 작가로 만들었다.
예리한 통찰과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인간성의 심연, 양가兩價적인 도덕, 현대사회의 모호성을 가열하게 파고들었던 그는 정치, 성性, 범죄, 종교, 경제, 세계정세, 언론과 같은 20세기의 주요 화두를 쟁점화한 작품들을 통해, ‘소설이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또한 ‘스릴러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순수문학과 ‘고도로 윤리적이고 심미적인’ 오락물 등 장르의 경계를 초월하면서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 20세기 스토리텔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팽팽하게 오가며 실존의 진리를 드러내려 했던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 남아 있다. 긴장감, 간결성, 극도로 편집된 대화, 속도감 있는 전개는 독자를 매료시키는 영화적 특성이 있어, 여러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권력과 영광』『사건의 핵심』『사랑의 종말』『제3의 사나이』『조용한 미국인』 등 25편의 장편소설을 비롯해 에세이와 문학평론 등 60권 이상의 책을 출간했다.

■ 옮긴이: 서창렬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조이스 캐럴 오츠 외 작가 40인의 고전 동화 다시 쓰기 『엄마가 날 죽였고, 아빠가 날 먹었네』를 비롯하여 『보르헤스의 말―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저지대』, 시공로고스총서 『아도르노』『촘스키』『아인슈타인』『피아제』, 자크 스트라우스의 『구원』, 데일 펙의 『마틴과 존』,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목차

21가지 이야기
파괴자들
특별한 임무
외설 영화
설명의 암시
사기꾼이 사기꾼을 만났을 때
일하는 사람들
아, 가엾은 몰링
피고 측 주장
에지웨어로 인근의 작은 극장
다리 저쪽
시골 드라이브
천진한 아이
지하실
레버 씨의 기회
형제
즉위 25년 기념제
하루를 버는 것
나는 스파이
확실한 증거
두 번째 죽음
파티의 끝

현실감
정원 아래서
모랭과의 만남
이상한 시골 꿈
숲에서 발견한 것

남편 좀 빌려도 돼요?
남편 좀 빌려도 돼요?
뷰티
회한 삼부곡
작은 여행 가방
영구 소유
8월에는 저렴하다
충격적인 사고
보이지 않는 일본 신사
생각하면 끔찍한 것
크롬비 선생
모든 악의 근원
점잖은 두 사람

마지막 말
마지막 말
영어 뉴스
진실의 순간
에펠 탑을 훔친 사나이
중위, 마지막으로 죽다
정보부 지부
어느 노인의 기억
복권
새로운 집
진행 중이지 않은 작품
불순한 이유에 의한 살인
장군과의 약속

새로운 단편들
축복
전투의 교회
팔켄하임 박사님께
국경의 저쪽

해제
옮긴이의 말 인간의 내면을 찾아가는 가열한 탐험
그레이엄 그린 연보


리뷰

구매자 별점

5.0

점수비율
  • 5
  • 4
  • 3
  • 2
  • 1

1명이 평가함

리뷰 작성 영역

이 책을 평가해주세요!

내가 남긴 별점 0.0

별로예요

그저 그래요

보통이에요

좋아요

최고예요

별점 취소

구매자 표시 기준은 무엇인가요?

'구매자' 표시는 리디에서 유료도서 결제 후 다운로드 하시거나 리디셀렉트 도서를 다운로드하신 경우에만 표시됩니다.

무료 도서 (프로모션 등으로 무료로 전환된 도서 포함)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시리즈 도서 내 무료 도서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리즈의 유료 도서를 결제한 뒤 리뷰를 수정하거나 재등록하면 '구매자'로 표시됩니다.
영구 삭제
도서를 영구 삭제해도 ‘구매자’ 표시는 남아있습니다.
결제 취소
‘구매자’ 표시가 자동으로 사라집니다.

세계문학 단편선


이 책과 함께 구매한 책


이 책과 함께 둘러본 책



본문 끝 최상단으로 돌아가기

spinner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