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더욱 짙게 자라는 저녁에는
보이지 않는 곳을 그리워할 줄 알게 되었다”
생활의 풍경을 유일한 것으로 만드는 투명한 시선
차츰 선명해지는 세계의 윤곽
문학동네시인선 228번으로 『두부와 달걀과 보이저』가 출간되었다. 그간 다정하고 온기어린 언어로 우리에게 깊은 시적 울림을 준 심재휘 시인의 신작 시집이다. 제1회 김종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문학동네, 2018)에서는 마음의 정동을, 근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창비, 2022)에서는 서울과 런던, 강릉의 풍경을 시화했다면 『두부와 달걀과 보이저』에서 그가 시를 통해 그려내는 것은 바로 생활이다. “‘생활’을 좋아한다. 살아 있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생활은 어디에나 있다. 혼자 오기도 하고 여럿이 오기도 한다. (……) 고장난 것을 다 고칠 수는 없지만 생활은 이어진다. 생활은 무엇일까”라는 ‘시인의 말’에서 그가 왜 ‘생활’을 시로 그리고자 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삶의 모습은 각기 다양하고, 때로는 극적인 사건 속에 놓이기도 하지만 “살아 있고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결국 생활 안에 존재한다는 새삼스러운 발견의 결과가 아닐까. 그러한 무상한 것들 사이에서 유상한 무언가를 눈에 담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리라. 아니, 어쩌면 시인은 단지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상함을 유상함으로 바꾸어내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우리는 심재휘 시인의 눈을 통해 우리 삶을 구성하는 일상적 요소들에서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 자체의 고유함을 만나게 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풍경은 대체로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시인의 시선을 빌려 그가 보았을 장면을 따라가보면, 그것이 실은 유일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최선교 평론가의 말처럼, 『두부와 달걀과 보이저』를 읽는 일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장면을 만나게 되는 일인 것이다. 그것을 “선물이 아닌 어떤 다른 말로 부를 수 있을까”(최선교, 해설에서).
막 일어서는 파도도 좋고
꽃이 필 사월도 좋지만 나는
다정한 모두부의 윤곽을 더 사랑하네
모두부의 비밀은 자르기 전에도
눈물겹도록 알 수가 있네
_「모두부를 시켜놓고」
이 시집의 첫 자리에 놓인 시는 「모두부를 시켜놓고」이다. “막 일어서는 파도도 좋고/ 꽃이 필 사월도 좋지만 나는/ 모두부의 윤곽을 더 사랑”한다는 시인의 말은 어쩐지 시집을 시작하기 전 독자에게 하는 작은 선언처럼 느껴진다. 이 시집에서 그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어떤 스펙터클이나 눈부신 아름다움이 아닌 부드럽고 안온한 일상의 장면들이라고 말이다. 역시나 시집을 읽어나가다보면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들은 달걀이나 간장과 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식재료들, 그리고 계절과 날씨 등 우리가 매일같이 만나고 감각하는 것들이다. 시인은 그렇게 매일의 식사나 매순간 호흡하는 공기처럼 우리의 생활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에 자주 시선을 멈춘다. 간장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오전, 젖은 베개를 말려주는 볕, 드문드문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한낮의 풍경은 비단 그의 것만은 아닐 것이지만, 그의 다정하고 투명한 시선을 통과한 풍경은 특유의 온기를 띤 채 우리에게 다가온다.
창밖에 나무가 흔들려 그곳에 바람이 부는 줄 알겠지만 물이 끓어도 달걀이 익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오래된 삶은 오래된 짐작 적당히 삶은 달걀을 찬물에 식힌다
껍질을 까면 표정도 없이 말간 밤이 온다 나는 물에 간장을 푼다 내일을 향한 나의 다정에 색이 올라오도록 너무 멀쩡한 달걀을 넣고 힘껏 졸인다 창밖에는 비가 오는 소리가 있고 창에는 내가 있고 두부를 생각할수록 내일은 아무데서나 온다
_「간장냄새가 희미한 오전」
특히 끓는 물 속에서 속이 제대로 익었는지 알 수 없는 달걀을 보며 “오래된 삶은 오래된 짐작”이라고 되뇌는 부분은 삶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짐작케 한다. 그의 표현처럼, 삶은 일종의 짐작일지 모른다. 그리고 짐작은 또한 믿음이기도 할 것이다. 삶의 본질은 개별 주체의 인식이라는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고, 우리는 그저 짐작할 뿐이다. 세상은 따뜻하다는 짐작, 세상은 아름답다는 짐작.
이 아픈 생각의 끝보다 더 멀리 가는 당신 도착은 없이 가기만 하는 당신 가다 가다 한 번은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주세요 나는 여태 이곳이어서 하현에 몇 자 적어 보냅니다
_「보이저」
이 시집의 마지막 자리에 놓인 시는 「보이저」이다. 첫 시에서 만난 두부와 보이저는 어쩐지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물들이지만 시집에 놓인 시들을 순서대로 따라가다보면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두부에서 보이저로 이어지는 시적 도약을 경험하게 된다. 부드럽고 포근하지만 선명하고 단호한 윤곽을 가지고 있는 두부와 끝없이 세계의 윤곽선을 넓히며 어둠 속으로 나아가는 흰 물체인 보이저로 연결되는 이미지처럼, 심재휘 시를 이루고 있는 심상은 생활에서 세계로 나아간다. 하루의 시간만큼 매일 세상의 끝으로 멀어지는 보이저. 하루하루 자신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일, 하루하루 세계를 가늠해가는 일. 그것은 작지만 우주만큼 커다란 일이고, 우리의 생활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심재휘는 시를 통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