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고 흔들리면서도 웃고 농담하며
생명 쪽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의 심장 소리
권민경 세번째 시집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출간!
문학동네시인선 210번째 시집으로 권민경 시인의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를 펴낸다. 아픈 몸을 살아내며 길어올린 치열하지만 명랑함을 잃지 않는 목소리를 담은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꿈을 꾸지 않고 오히려 실현하기 위해 삶을 탐구하는 기록을 펼쳐 보인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 이후 펴내는 세번째 시집이다. 박상수(시인,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권민경 시인이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을 출간한 뒤 펴낸 산문집 『등고선 없는 지도를 쥐고』(민음사, 2023)에서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사실을 고백한 것을 언급하며 “실존과 완전히 분리하여 그의 시를 읽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번 시집에서도 “잘린 장기와 춤은 어디로 사라졌니”(「자연—뛰는 심장 어디로」) 같은 구절 등에서 시인이 그리는 아픈 사람의 정체성이 감지된다. 하지만 방점은 고통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고통에서 거리를 둔 채 한 발짝 뛰어오르게 하는 시니컬한 유머에 찍혀 있다. 이를테면 “눈물은 나의 굿즈”(같은 시)라는, 키치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머가 그것이다. 고통받고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웃고 농담하며 생명 쪽으로 나아가는”(해설) 생생한 활력이 넘실거리는 이번 시집은, 생의 열망에 들떠 무수하게 벌이는 실수들까지 뜨겁게 끌어안는 너른 품을 보여주며 읽는 이에게 울림 큰 위로를 전해준다.
눈물은 나의 굿즈.
아무도 있었다는 것을 모르게 사라져버리기.
잘린 장기와 춤은 어디로 사라졌니.
경주마가 죽으면 그를 아끼던 사람이 편자를 취한다.
넌 어디로 갔니. 참담한 일을 당하면 말을 잃어버린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아무 일도 겪지 않았다.
안이 아무리 아파도 오리역을 지나 구파발에 가도 나는 직립한다.
‘시인이 하도 많아서 내가 사라져도 될 듯함’
조각난 나의 말.
뛰어내렸으나 솟구쳐올랐다.
_「자연—뛰는 심장 어디로」에서
1부 ‘이 동그라미에 대해’는 몇몇 시에서 나타나는 ‘원’의 이미지를 통해 삶의 순환성을 사유하는 듯하다. 시집의 문을 여는 「닳은 공」을 보자. “가죽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열심히” 공을 튀기는 “우리”의 “땀냄새와 열기”는 우리네 삶이 “서브 리시브 토스 앤 토스”라는 매일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권민경이 그리는 ‘원’의 이미지는 삶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 동그라미에 대해」의 시적 화자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짧게 쓰기를 어려워하고 “꽉 막힌 결말”을 내지 못한다. “일말의 다정함 무의식적인 친절들”이 “없는 장기들”을 대신해 “뼈와 살”이 되어준 몸으로 “영원히 살아 있는 채로 있고만 싶”다고, “이기적으로 영생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화자는 출발점과 끝점이 같은 동그라미의 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권민경이 그리는 동그라미는 둥글게 닫히지 않는, 처음에서 영영 멀어지기를 소망하는 포부로서의 ‘원’이다.
나에게 맞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나는 어느샌가 나를 입고
뻘짓을 하고 있다
선생님이 무서운 흙을 물레에 얹고
빙글빙글 돌리는 순간
난, 나는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며
보이지도 않는 걸 돌리는 시늉 한다
차본다
_「세라믹 클래스」에서
한편 2부 ‘대자연’은 ‘자연’ 연작시이다. 시인은 편집자와의 미니 인터뷰를 통해 자연이란 “우리의 배경, 우리 삶, 결국 삼라만상”이라고 대답한 바 있다. 1부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면, 2부에서 삶의 근원적 순간을 포착하는 시인의 깊이 있는 시선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꿈속이나 비현실이 아니라 천변이나 학교, 신도시, 목욕탕 등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적이다. 자칫 현학적일 수 있는 주제를 담은 이 연작시가 높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한 사랑이 끝나는 동안 나는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천변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 개가 많을까 개를 데리고
나오지 않은 사람의 집에 고양이가 있을까 상상하며
저물녘을 맞았으며
이것이 밤의 시작인 것이
분명했다
_「자연—밤의 중간」에서
학교에서 도망쳐서 온 곳은 겨우 집
담임도 그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애들이 할 짓은 빤하다
며 갈 곳도 없다며
온갖 학생들이 굴러 나오고
온갖 심술들이 싹을 튀우고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
잘 보세요 자학과 자책의 시간을 견뎌온
사과 같은 내 얼굴
사과 위에 사과 위에 사과
몇 살부터 몇 살까지로 특정할 수 없는 가슴 아픈 그림들
온갖 온갖 온갖 낮들
_「자연—사춘기」에서
3부 ‘죽을 너와 부활한 나를 위해, 춤’은 죽어 사라진 사람들을 그리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 “아홉 살에 멈춰 있는” “종일이”를 “영원히 있게 하려” “시인이 되었다고”(「종일」) 시인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건 네가 아니라 너의 죽음뿐”이지만, “죽은 사람도 생일이 있어 매해 찾아”(「권―4월 16일」)오기에 “목숨에 책임감 느끼며/ 나에게 다가오지 않을 손을 믿습니다”(「허니문」)라고 고백한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함께 있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이러한 시들을 통해 1부와 2부에서 보여준 삶에 대한 태도와 존재론적인 사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까지 끌어안으려는 안간힘이 눈물겹다.
하지만 권민경은 시에서 그러한 숭고함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나한테 해를 끼친 사람은 피해를 본다/ 고 믿었던 적 있다” “하지만 다정한 사람도 아프고 못된 사람도 아프고/ 앞뒤 가리지 않는 불행을 과연 저주라 할 수 있을까”(「저주 기계」), “제사상 받으러 온 조상님께 말합니다/ 나를 왜 낳으셨나요 왜 내 단초가 되셨어요”(「심경 고백」)와 같은 대목처럼 아무리 멀쩡한 이도 결국에는 아프고 불행해지기 마련인 삶의 순리 앞에서 좌절과 분노를 내비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권민경은 죽음조차 특유의 시니컬한 위트로 표현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웃어넘길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착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사람에게 윽박지르고
영원히 나는 윽박지르는 자세로
버스에 올라타고 창문을 내다보고 기스 난 부분을 쓰다듬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도
늘 윽박지르는 그대로이다
여러 번 붙여넣기를 한
목덜미가 뜨거워지고
모가지가 달랑달랑
아빠 아빠 아빠 몰아붙이는 마음
이분의 일 확률로 물려받은 나의 병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_「내가 말할 고통은 이런 게 아닌데」에서
4부 ‘말의 기원, 맘의 끝’은 시쓰기에 대한 시를 노래한다. “놀랍게도/ 시인도 노동의 기쁨을 안다/ 한참 이빨을 까고 집에 돌아가는 길”(「시인이라는 유행 직장」), “나는 최신형 셰에라자드/ 어제는 독침을 쏘았네 오늘은 세무사와 서커스 내일은 시민 운동장에 갈 것이네”(「천 일 동안 고백」). 시인의 시쓰기는 종내 “사랑을 사랑을 노래하고/ 불행과 실연을 노래”(「백업 싱어」)하는 대중가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꾸 시가 아닌 시의 목소리가 떠오”른다고 말하는 시인은, 시쓰기란 현실에서 울고 웃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 “사이렌”과 “단말마”(같은 시)에 귀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집의 마지막에 수록된 「팀파니 연주자여 내게 사랑을」은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보여준 시세계의 총체를 보여주는 강렬한 시다.
당신은 부피를 갖고 질량을 갖고 무게와 길이로 수치화된다
존재감은 모든 것을 퉁치는 말이지만
사랑이여 사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아니, 아니, 사람이여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팀파니를 둥둥 울리며 걸어갑니다—그건 불가합니다
둥둥 울리며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귓구멍으로 들어와 해골을 공명합니다 뇌도 자극합니다 가능합니다
(……)
팀파니 주자여 찢어진 가슴을 더 두들겨 찢어주시고
새 자루에 새 술 담듯 새 악기에 새 사랑과 새 영혼과
그 모든 일련의 질량 없는 것들 가득 담아주소서
사랑이여 담겨주소서
남의 가죽이 아닌 나란 자루에
우승 기원으로 담근 과일주에
연주만을 위해 지어진 전용 홀에
눈구멍 속에 담긴 눈알 같은
이 지구에
_「팀파니 연주자여 내게 사랑을」
인간이란 “부피”와 “질량”, “무게”와 “길이”로 수치화된 존재이지만, 그런 인간이 하는 사랑이란 여전히 규정하기 어렵다. 시인은 이러한 사랑을 “쿵쿵쿵쿵쿵” 울리는 팀파니 소리로 묘사한다. “찢어진 가슴을 더 두들겨 찢어주시고” “새 사랑과 새 영혼”처럼 “그 모든 일련의 질량 없는 것들”을 가득 달라고 시인은 외친다. 그때 “쿵쿵쿵쿵쿵”은 팀파니 소리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심장 소리가 된다. “절찬 상영 방영 공연 대유행중”인 “사랑”을 위해 언제고 “킹콩”처럼 일어서는 권민경의 시를 읽으며 가슴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이미 모두 권민경의 ‘뛰는 심장 팬클럽’(해설, 박상수)에 속한 것이다.
언젠가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무릎도 펼 수 없는 힘든 시간은 다시 찾아올 수 있겠지만 ‘훼손된 나’ 역시 사랑할 줄 아는 권민경의 화자라면 눈물 콧물 쓰윽 닦고 또 일어설 것이다. 그토록 힘든 시간을 통과한 뒤에도 이와 같은 건강한 자의식과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반갑고 고맙다. (……) 울고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이 소리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소중한 것을 지키며”, “새 악기에 새 사랑과 새 영혼과/ 그 모든 일련의 질량 없는 것을 가득 담아”서, 쿵!쿵!쿵!쿵!쿵! 사랑이여 여기 오라. 영혼이여 우리와 함께하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뛰는 심장 소리로 가득 채우라. 쿵!쿵!쿵!쿵!쿵! _박상수, 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