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세계≫는 상편만 발간되었으며 하편은 발간되지 않았다. ‘신연극’이라는 한자를 집자해 작품 표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연극 공연을 염두에 두고 쓰였으며 실제로 원각사에서 장기간 공연되었다. 때문에 이 작품은 신연극의 효시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은세계≫는 문명개화와 계몽이라는 신소설의 사회적 기능, 그리고 이인직의 소설 세계의 특징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은세계≫를 시종일관 관통하는 것은 계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이다. 계몽 의식은 소설 전체에 걸쳐서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거나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다채로운 함의로 변주된다.
이인직은 신소설의 선구자로서 한국 문학의 근대화에 기여한 문학적 성과에 대한 지적이 한 축을 이룬다면, 이완용의 하수인으로서 친일적인 정치 행로를 보여주었다는 비판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볼 때 두 면모와 평가가 상호 결합·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병도는 강원도의 양반 부자다. 강원 감사가 최병도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누명을 씌워 온갖 형벌을 가하지만, 최병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 결국 죽음을 맞는다. 표면적으로 볼 때 최병도의 이야기는 부정부패한 관료와 이에 저항하는 백성의 대립, 그리고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민중의 비판 의식을 드러내는 텍스트다. 최병도의 이야기가 전래하던 판소리 <최병두 타령>에서 개작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 때, 이러한 반봉건 의식은 피지배층의 심판 의지가 자연스레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은세계≫에서 반봉건 의식은 단순히 봉건적 관료제와 불합리한 지배 구조의 타파를 목적하지 않는다. 이인직은 최병도라는 인물에게 개화사상의 세례를 받은 지사적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최병도의 이야기를 봉건 질서와 개화사상이라는 신구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으로 새롭게 확장한다. 그래서 반봉건 의식의 표출은 개화와 계몽의 시대적 소명을 발의하기 위한 문제 제기로서의 성격을 띤다.
옥순과 옥남 남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후반부에서 봉건적 관습에 대한 비판과 저항 의식이 전통과 근대의 대립구도를 통해 표출된다. 특히 가족과 혈연주의라는 뿌리 깊은 ‘전통적’ 관습을 다루는 작가 특유의 시선은 인상적인데, 옥순과 옥남 남매의 관점의 대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유학 중에 옥순이 고향과 아픈 어머니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것과 달리, 옥남은 미국의 새로운 문명을 경험하느라 고향의 기억을 잊는다. 옥순이 개화된 세계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찍이 문명에 눈을 뜬 계몽적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가족주의를 무엇보다 우선하는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은, 봉건 사회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계몽적 자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통과 근대 사이의 갈등과 혼종화 양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작가의 전언은 옥순이 아닌 옥남의 관점에 놓여 있다. 옥남은 누이를 타이르며 ‘개인’과 ‘가문’에 앞서 ‘나라’와 ‘백성’을 이야기하며, ‘효성’에 앞서 ‘국민의 의무와 직분’을 환기한다. 개인과 가족에게 닥친 불행과 질곡을 “나라의 졍치가 그른 곡졀”로 바라보는 옥남에게 효와 가족주의는 사사로운 전통일 뿐이다. 그리하여 위에 인용된 옥남의 발언처럼, 효·혈연·가족 등의 전통적 가치들은 ‘국가’라는 대타자와 등가적으로 취급되거나 ‘계몽’의 논리 속에 흡수된다. 전통과 근대의 대립적 관계가 근대에 의한 전통 흡수의 논리로 재편된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계몽의 정신을 설파하는 장르로서의 신소설이 놓인 어중간한, 그러나 불가피한 입지를 잘 보여준다. 전통이란 결코 타파해야 할 것도,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계몽의 논리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계몽을 강조하는 것이 이 소설이 풀어내야 할 하나의 전략인 것이다. 옥남의 발언이 혈연주의와 가족주의의 타파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적 가치를 대타적인 부정의 항으로 설정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순·옥남 남매와 어머니가 해후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듯 가족 공동체의 복원을 새로운 국가 설립의 근간으로 설정하는 이율배반적 태도야말로 어쩌면 이인직의 계몽, 혹은 신소설이 놓여있는 전통과 근대 사이의 미묘한 균열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옥남의 ‘흡수’ 논리는 전통을 결코 삭제하지 않고서 근대의 정신과 계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섬세하게 피력된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작품 속에서 계몽의 기획은 결코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최병도에서 옥순·옥남 남매로 이어지는 세대론적 플롯을 통해 계몽에 대한 아버지 대의 희구는 자식 대의 미국 유학으로 이루어지는 듯 보이지만 귀국 이후의 실천적 행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인직이 제시한 계몽의 기획은 애초에 많은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부패한 나라를 개혁하고 혹세무민한 민중을 구제한다는 목적을 내세우는 이면에는 그것이 신문명에 개안한 소수의 특권층에 의해 가능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인직 소설의 한계는 아마도 자기의 시대를 규정짓는 조건과 한계 상황을 타자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이미 결정화된 체계로 받아들인 지식인의 한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