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불면증도 바람도 자유도 안식에 들었다
해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삶의 비참을 비틀고 자라나는 황홀
허름한 자유를 향해 웅혼하게 나아가는 시
1973년 등단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비참과 고통의 시대를 오로지 ‘시’로 감당해온 김승희 시인의 열두번째 시집 『빵점 같은 힘찬 자유』가 출간되었다. 2021년 만해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청마문학상 등을 수상한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창비 2021)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허망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역설적으로 우뚝 솟아나는 자유를 향한 의지를 뜨거운 언어로 노래한다. 50여년의 시력(詩歷)이 증명하듯 깊은 통찰력과 예지력을 겸비하면서도 나이가 무색할 만큼 활달하고 다채로운 시편들을 통해 “시인은 나이 들어도 시는 나이 들지 않을 수 있다”(오은 시인, 추천사)는 경이로움을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삶의 어둠과 시대의 절망을 끌어안으며 “기어이 그 한가운데를 다 겪어”내는 시인의 단단한 자세와 진득한 응시에서 우리는 “2026년 이후의 한국문학사는 김승희의 열두번째 시집에 빚을 지게 될 것”(양경언 평론가, 해설)임을 예견하게 된다.
“고통과 아픔 속에서 누런 보리밭 속에서
나의 시는 무르익었다”
소멸하는 허무를 건너 생의 뜨거움으로
김승희는 허망을 말할 때조차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시인은 시집을 열며 “가난이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 말하며, “휘발되지 않”는 슬픔 속에서도 “어진 기운이 나오는 파릇한 움틀임”(「가난에 대하여」)을 포착해내는 생의 의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의지는 “희망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밤”에도 “돌이 기억하는 희망이 있을 것”(「그래도 푸른 하늘이 많다」)이라 되뇌며 허무 너머 삶의 근원을 파고드는 통찰로 기운차게 펼쳐진다.
시인이 거듭 언급하는 자유란 “백지 한장에/파란 줄 하나 그은 수평선 같은/그런 무(無), 없음”의 상태로 “속박을 벗어나서 나아가는 것”(「빵점」)이다. 이 “빵점 같은 힘찬 자유”(「자유라는 말에 대하여」)는 “저절로 사는 자유”이며 전쟁과 폭력과 혐오로 얼룩진 세계에서 “제각기의 얼굴로 마음으로 삶으로 저절로 살아나고자 하는”(해설) 생명의 힘이다. 시인은 “하얀 수증기에 살이 익어가는 고통”과 “맥락이 끊어진 뼈의 고통”(「이 뜨거운 시」)을 감내하면서 “빛을 사랑하지만 그늘진 시간을 살아”온 존재들의 “존엄한 생의 이야기”(「야근을 하는 옥잠화에게」)를 “심장이 뜨겁게 뛰는 자유”(「남의 힘 속에 있는 자유는 없다」)의 이름으로 기록한다.
그렇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세부를 어루만질 때, 시인은 함께 호흡해온 동시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다. ‘작가의 방’을 꾸미기 위해 놓아둘 만한 것이라고는 “별 볼 일 없는” 초라한 살림살이뿐이지만 결국 “우리는 불멸보다 일상으로 연대”(「여성 작가의 방」)한다는 깨달음에 가닿는가 하면, 똑같은 이름을 가진 수많은 여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운명 같은 자매혼”을 느끼기도 한다. 그가 “우리에게는 이름이 있고 스토리가 있고/사랑도 꿈도 실패도 눈물도 비애도 고독도 있”(「불면증의 선인장 숲」)다는 위로를 건네며 맞잡는 손길이 더없이 소중하다.
한편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순환하는 생명의 질서를 깊이 사유하는 시편들은 이번 시집을 더욱 각별하게 만든다. 묘를 이장하는 현장에서 “묘혈 바닥에서 누에고치 같은 것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죽음이 곧 새로운 탄생의 자리이기도 함을 직관하며, “약속도 없이 흰나비들은 날아서 춤추고/나는 그때 아주 오래전에 죽었고 새로 살았습니다”(「얼마나 깊은 고독 속에서 무수한 흰나비가 날아오는지」)라는 고백을 통해 소멸과 생성이 하나로 맞물려 있음을 시사한다. 죽음이 단지 생명의 단절이 아니라는 인식은 “땅끝이니까 바다가 나오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땅끝’이 더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곳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이 되는 이치와 같다. 시인에게 ‘땅끝’은 “모든 아픔의 역사가 여기에 와서 소멸되는” 안식의 공간이자 “붉은 피가 콸콸 끓고 있는”(「땅끝 마을」) 또다른 생성의 자리이다.
“불현듯 나는 내가 자유롭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 빵점 같은 힘찬 자유가 나는 좋다“
“빵점 같은 힘찬 자유”는 관습의 감옥을 부수고 나아가는 용기이기도 하다. 시인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소외시키고 존재의 의미를 잃게 만드는 상투어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며 “삶의 상투어를 부수는 자유를 향한 용기”를 촉구한다. 이는 규격화된 삶을 강요하는 관습적인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는 의지이며, “새로운 삶의 편린에 대한 반짝이는 열정”(「아침마다 생각마다 빨간 사과가 온다」)을 회복하려는 생명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태도는 “허망한 것이 충분해질 때 자유를 알게” 되듯 “마음껏 다 허망할 때/비약적으로 자유로워”(「바니타스 아래 자유가 자란다」)지는 해방의 순간을 꿈꾸게 한다.
김승희는 이번 시집에서 ‘자유’의 의미를 새롭게 사유하는 한편, 무모한 전쟁과 폭력에 가까운 혐오, 자본주의의 횡포와 정치적 분열로 얼룩진 오늘의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면서 “비관적이며 비참한 이 어두운”(시인의 말) 시대에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늘 ‘지금-여기’를 사는 시인은 우리가 “끝의 끝, 끝, 진짜 끝, 마지막 끝”(「땅끝 마을」)이라고 부르는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모색한다. “시를 쓰게 되면 그대로 살게 된다”는 경험을 토로하며 “나는 시 쓰기가 두렵다”(「시를 쓰게 되면 그대로 살게 된다」)라고 말하지만 시인은 “절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마음에 대하여」) ‘지금-여기’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시는 멈추지 않고 “끝에서 끝까지 끝에서 끝으로”(「뼈 항아리」) 미래를 향하여 “늘 비포장도로로 나아”(「시를 쓰게 되면 그대로 살게 된다」)갈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자유라는 말이 저절로”(「사전연명의료의향서」) 터져 나오는 해방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